제2차 세계대전 -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
앤터니 비버 지음, 김규태 외 옮김, 김추성 감수 / 글항아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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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히틀러는 폴란드에 대해 느끼는 국민의 강한 분노를 이용했다. 그 분노의 근원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가 서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일부 지역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동프로이센과 나머지 제3제국을 분리하면서 폴란드를 발트 해에 도달하게 해준 단치히 자유시와 폴란드 회랑은 베르사유 조약의 가장 불공정한 조항 중 두 가지로 선전되었다. (-38-)

6월 10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군사력과 자원의 약세를 잘 알면서도 프랑스와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평화가 찾아오기 전에 영토적 이익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독일이 모르는 사이에 알프스를 공격했다가 결국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군은 200명 남짓 병사를 잃었을 뿐이지만 이탈리아군은 6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급중 2000명 이상은 동상에 걸렸다. (-177-)

같은 날 이른 아침, 거만하기로 유명한 제8 비행단의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항공 대장은 제5상악사단의 공격을 살피러 루펠 협곡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국경으로 가서, 자신이 지휘한 슈투카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새벽 4시에 리히트호펜은 전투 사령부에서 일기를 썼다."날이 밝아오자, 대포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화가 엄청나다. 이어서 폭탄이 터졌다. 그리스에 인사치레치고는 과도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리히트호펜의 항공기가 아군을 폭격하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제 5 산악사단을 당황케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그리스군은 리히트호펜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끈질겼다. (-240-)

'독가스 홀로코스트'는 두서없이 이뤄졌다. 1935년 초에 그랬듯이,히틀러는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안락사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심신미약 범죄자, '의지박약',무능력자,선천적 장애가 있는 아이, 이들 모두가 나치가 정한 '생존 가치가 없는 생명'에 포함되었다. 첫번째 안락사는 1939년 7월 25일 ,히틀러 자문위원회 구성을 부탁했던 히틀러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가 실시했다.(p330)

1941년 12월 6일, 모스크바 주변에서 소비에트가 반격을 시작하고 있을 때, 미국 해군 암호해독 전문가는 일본 정부와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 사이에 오가는 메시지를 해독했다. 비록 마지막 부분은 놓쳤지만 의미는 아주 명확했다. 신호가 잡힌 그날 저녁, 루스벨트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해리 홉킨스에게 "이건 전쟁을 뜻한다" 고 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히로히토 천황에게 싸움에서 물러나기를 촉구하는 개인적인 메시지를 막 보낸 참이었다. (-373-)

어떤 사람은 일기장에 "우리 눈 앞에서 사람들이 짐승으로 변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굶주림으로 미쳐버린 사람도 있었다. 소비에트 역사에서는 식인 행위가 없었던 것처럼 꾸미려 하고 있지만, 여러 일화와 기록이 식인행위를 증명해주고 있다. 포위 기간에 '인육을 식용으로 사용한 혐의'로 약 2000명의 체포되었고, 그중 886명이 1941~1942년 첫겨울에 잡혀갔다. (-435-)

히틀러가 연설한 다음 말인 11월 9일, 스탈린그라드에 겨울이 찾아왔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영하 18도를 기록했고, 볼가 강을 건너는 일도 더 위험해졌다. 으스스한 소리를 들은 그로스만은 "얼음 덩어리가 서로 부딪쳐 부서지고 깨진다." 라고 기록했다. 재보급과 부상병 후송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독일군 포병대 사령관들은 적군이 직면한 문제를 알고 도하 지점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11월 11일에는 독일군 6개 사단으로 이뤄진 전투 집단이 4개 대대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시작했다.그날 밤 추이코프는 즉시 반격을 개시했다. (-551-)

독일군은 식량을 아끼기 위해 포로들에게 전혀 음식을 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몇몇 생존자는 죽은 전우의 시체를 먹어야 했다.

현실을 오랫동안 부정할 수 없었다. 소비에트 전차가 타친스카야 비행장을 공격하는 바람에 이틀간 수송기가 오지 못했다. 제6군은 눈을 녹인 물에 말고기 몇 조각을 넣어 삶은 수프로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 12월 중순에 포위망 안으로 날라온 군 병리학자 한스 기르겐존 박사는, 시신 50구를 부검한 뒤 곧 놀라온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군인들이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속도가 다른 상황보다 훨씬 더 빨랐던 것이다. 그느 이것이 스트레스와 장기간의 영양 결핍, 수면 부족,극심한 추위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600-)

11월에 할지의 군대는 라바울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큰 섬인 부건별 섬에 상륙했다. 맹그로브 늪지대와 밀림, 산악지대가 공존하는 부건빌 섬은 뉴조지아의 지세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게다가 4만 명의 일본군 수비대는 4개 비행장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할지는 가까운 섬들을 대상으로 몇 번의 견제 공격을 개시한 다음, 서해안 가운데 수비가 약한 지점에 2개 사단을 상륙시키고 이어서 라바울을 향해 대규모 공습을 벌여 일본군 비행기 100기 이상을 파괴했다. (-698-)

클라크 예하 제5군은 나폴리에서 서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진군하던 중에 볼투르노 강에서 첫 번째 장애물을 만았다. 10월 13일 이른 시각, 사단 및 군단 포병대가 강 너머를 목표로 대규모로 포문을 열었다. 영국 제56사단은 해안 근처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강의 너비가 넓기는 해도 걸어서 건널 수는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 넓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케셀링은 연합군을 최대한 반도 아래쪽에 고립시킬 생각이었다. 북쪽에서 독일 사단을 지휘하며 철수를 주장했던 로멜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798-)

제1사단의 어느 대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어떰 보트는 양륙 후 돌아오고 있었고, 또 어떤 보트는 다소 침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분투하고 있었다. 어떤 보트는 좌초되어 프로펠러가 물 밖에 나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어떤 보트는 뒤로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접안을 시도했다....나는 옆에서 파도에 뒤짚혀 부대원들이 물속에 모두 빠져버린 상륙정의 모습을 보았다. 포탄에 맞아 크게 훼손된 상륙정이 파도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도 보았다. 버려져서 병력은 없고 침수된 채 파도에 씻기는 보트도 보았다. 전우들은 그 비참한 가운데서도 어덯게든 자신을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877-)

독일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과 장군들은 신병들의 전투능력이 불만스러웠다. 헝가리 동부와 슬로바키아를 방어하기 위해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히틀러의 마지막 동맹국 군대가 소련군 베테랑들을 놀라게 했는데, 특히 루마니아 군의 순식간에 붕괴된 것을 본 이후라 놀라움이 더 컸다. 어느 붉은 군대 장교는 "헝가리군은 사실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우리에게 큰 골칫덩어리였다. 그들은 끝까지 , 그리고 최후의 한 명까지도 매우 용감하게 싸웠다. 항복이란 건 절대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974-)

이오 섬 전투가 종료된 3월 25일까지 해병대원 6821명이 전사하거나 치명상을 입었고, 1만 9217명이 중상을 입었다. 자살한 두 명을 포함하여 포로로 잡힌 일본군 병사 54명을 제외하고, 구리바야시의 병력 2만 1000명은 모두 사망했다. 구리바야시가 마지막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하자 그가 이끌던 병사들이 굴 깊숙한 곳에 그를 묻었다. (-1059-)

패전이 임박했는데도 아직 100만명의 일본 군사가 버티고 있는 지역에서는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잔학 행위가 계속되었다. 뉴기니나 필리핀과 같은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병사들은 군량이 부족해지다 현지 주민이나 포로들을 식량으로 여겼다. 일본군인 에노모토 마사요는 자신이 어린 중국 여성들을 강간 및 살해, 도살했음을 훗날 고백했다. 그는 고기가 많은 부분을 고른 뒤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육질에 대해 "부드럽고 맛있었다. 돼지고기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음식의 정체를 안 지휘 장교도 에노모토를 꾸짖지 않았다. (-1169-)

제2차 세계대전 하면 히틀러와 마루타가 떠오른다. 인간을 향한 잔인하고 가혹한 그들의 행동, 그들은 왜 전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펼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대한민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몸으로 역사로 겪은 나라이며, 여전히 전쟁에 대한 아픔과 고통, 상흔이 남아있었다.세대별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슬픔이 현존하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사태는 아직 미해결상태이다. 독일과 일본이라는 두 제국주의 국가가 자행한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 속에서 한 국가의 무능력함을 마주하였으며, 전쟁은 일어나면 안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최근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러시아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로 구분된다. 두 세대가 서로 화합하지 않고 갈등과 반목을 일삼고 있으며,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세대차이는 극명하게 나누고 있었다. 민족주의가가 강한 나라로서, 경제적 자본주의가 정착되었다. 최근 좌우 정권이 바뀌었고, 좌우 갈등이 다시 표출되고 있는 모양새다. 극우보수단체는 바로 우리의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서 그들의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서 정치쇼라 부르고 있다.하지만 나의 입장에선 남한과 북한의 리더가 만나서 남북 갈등 해소, 동족간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더 이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통일 독일처럼 될 수 없다면, 분단된 상태에서 내 후대에 통일을 기약하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제대로 된 협력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쟁에 관련한 주요 사건 사고들보다 그 안에 있는 군인들의 모습, 민간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히틀러와 맥아더, 스탈린, 무솔리니, 일본과 독일, 미국과 소비에트, 처칠 등등등. 서로가 전쟁 속에 휘말리면서 히틀러가 생각했던 전쟁의 방향은 점점 더 어긋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히로타 고지,하야시 센쥬로,히라누마 기이치로,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츠마사,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구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이렇게 9명의 총리가 있었으며, 도조 히데키, 아베 노부유키, 스즈키 간타로는 그 당시의 역사와 엮이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전쟁 속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밑으로 하달하지만, 그것이 계획된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선동과 분노를 이용한 전면전, 일본은 그 과정에서, 독일의 전선의 변화에 따라서,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공격을 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 서로가 서로에게 파괴와 약탈을 일삼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된다.전쟁이 야만적이고, 잔혹한 이유는 ,죽음 앞에서, 법,도덕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인육을 먹었으며, 포로를 잡아 먹거나 가족을 잡아 먹어 버리는 참극이 반복되고 있었다. 전염병, 질병,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민간인이 늘어나게 된다.전쟁으로 인해 어린이가 죽어간다. 일본군과 독일군이 지나간 도시에는 파괴와 파멸만 존재하였으며, 복수와 응징, 배반이 존재하게 된다.그들이 생각하는 전략과 전술은 이성적이지 않으며, 선동적이었고, 감정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그 과정에서, 영국의 처칠 수상은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군인들은 죽어나갔고, 독일군 병사는 전쟁 속에서 독일 본토에서 수송기를 통한 군량수송이 끊어지면서, 스스로 생존을 건 목숨 유지, 자급자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되는 경우보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전쟁 기록 속에서의 잔인함의 형태는 바로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인육 그 자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옆의 또다른 인간을 먹는 행위는 결국 파멸로 종결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대안이 없었고, 생존을 위해서, 선택해야 한다. 말을 죽여서 말고기를 먹었으며, 민간를 약탈해 주린 배를 채워 나가게 된다. 포로를 통해 탐욕과 성욕을 채워 나갔다. 또한 유럽 각국의 나라들을 침공하면서, 그 나라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가게 된다. 혹사병,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였으며, 대공항으로 인해 경제가 마비된 상태다. 러시아와 북유럽 각국에서의 전쟁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적군과 아군 가릴 것 없이 죽음만 남아있었다. 히틀러의 오판 속에는 바로 독일군 병사들에게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 미국의 전쟁 개입은 늦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그의 생각이 옳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스페인, 유럽 각국은 허약하였고, 겨우내 버티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전쟁의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히틀러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는 걸 알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게 태평양과 대서양을 기준으로 전면전이 시작되는, 절호의 기회였고, 영국의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과시하지 못하였으며, 히틀러의 잔혹한 행위를 억누르지 못하였다.

전쟁은 승리와 패배로 판가름되지 않는다. 전쟁은 생존과 죽음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차이를 놓치고 있다. 전쟁을 몸소 겪어 보지 못하는 이들은 전쟁이 가져오는 참혹한 형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안에 스스로 갇혀 버린다는 게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다. 시리아 공습이나 중동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슬람 -아랍 전쟁의 형태에서 본질은 빠진 채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양상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일어나는 그 순간 옳은 것은 사라지고 그른 것만 존재한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분명하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이후의 양상을 들어다 보면 전쟁을 결코 하면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전쟁은 해서는 안 되는 것 뿐만 아니라,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피폐해지고, 파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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