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개성상인 2 - 한복을 입은 남자
오세영 지음 / 문예춘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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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나 제노바의 경우를 보더라도 앞으로는 금융부문에 중점을 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융을 강화하더라도 피렌체처럼 유럽 왕실을 상대로 재부를 하거나 제노바처럼 신대륙 개척사업을 투자를 하는 것은 시기상조며 결과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자본시장이 더울 성장할 것입니다. 따라서 환거래를 크게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델 로치 상사에는 그 분야에 인재들이 여럿 있습니다." (-12-)

"지옥에나 가라, 동양인!"

"돈이면 다냐!"

고메츠의 선동은 즉각 효과를 냈다. 선원들은 당장 잡아죽일 기세로 안토니오에게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에 성큼 고메츠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던 선원들은 안토니오의 돌연한 표정에 움질하며 걸음을 멈추었고 고메츠는 어쩔 셈이냐는 표정으로 안토니오를 노려봤다. (-120-)

틸리백작이 단언했다.

"보아하니 반호프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용병대장이지 폭도대두목이 아나네."

보수가 제때 지급되지 않으면 용병들은 폭도로 돌변하는 수가 있다. 틸리 백작은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철군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안토니오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틸리 백작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었다.(-233-)

'성엘보의 불' 견습사관이었던 디에고는 신대륙 항해를 함께했던 안토니오와 포르타, 그리고 리스본 항에서 기자리고 있었던 팔라디오와 반갑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안토니오는 조선업에 진출하면서 호세에게 배와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달라고 서신을 보낸 적이 있는데 호세가 디에고를 추천했던 것이다.

"호세는 잘 있나?" (-341-)

스웨덴의 자존심이었던 바사 호는 1628년 8월 10일, 430명의 사관과 수병들을 태운 채 진수식 날 바로 스톡홀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큰 기대를 안고 건조되었지만 제대로 바다로 나가지도 못하고 물 속에 잠기고 만 것이다. (-374-)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1577~1640)의 작품 《한복 입은 남자》 가 있다.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소설가 이상훈의 『한복 입은 남자』 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티브로 한 또다른 소설이 바로 『베니스의 개성상인』 이다. 이 소설은 원균이 수전에서 일본수군을 대상으로 대패한 칠천량 전투로 ,전투 결과로, 조선 포로가 지팡구로 가게 되는데, 유승업도 그 조선 포로 중 하나였다. 유승업은 조선에서, 지팡구로, 그리고 피렌체가 있는 이날리아로 건너가게 된다. 그가 보여준 뛰어난 무역상으로서의 존재감과 유승업 특유의 눈빛이 후원자 프란체스코 카를레티 부자에 의해서, 개성상인, 송상 특유의 무역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 유리 기술은 유출되어서는 안되는 특수한 생산품이었다. 유승업은 그 유리를 무역과 연결하게 된다.이후 조선업과 인쇄업을 번갈아 하면서, 개성상인이 추구하였던 복식부기법이 유럽 베네치아 상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송도 회계를 대표하는 사개송도치부법은 무역에서 바질 수 없는 중요한 회계도구였으며, 유승업이 유럽에서 안토니오 꼬레아로서, 결혼하고, 유럽에 정착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유승업은 한복을 입은 남자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그가 무역을 하였던 17세기 유럽은 해적이 간헐적으로 출몰하던 시기이다. 그는 해상무역에 있어서, 남다른 수완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개성상인으로서, 상단을 꾸리는 것 뿐만 아니라, 군대에 준하는 강력한 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상단이 군사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화포를 이용하여, 해적을 무찌를 수 있는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해적의 수장을 단번에 제압하였으며,유리 세공품, 인삼, 조선술,인쇄업까지 병행하여, 유럽사회의 무역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도맡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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