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지은 집 -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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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대학교수이고 글 쓰는 사람이니까 우리 집에는 두 개의 서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시인과 소설가들은 창작촌 같은 데 가서 글을 쓰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안 된다. 강의 준비나 평론, 논문 등은 책을 많이 펼쳐 놓고 써야 하는 글이어서 밖에서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다가 이어령 선생은 전업 작가가 아니어서 날마다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었고, 나는 아이들을 기르며 짬짬이 글을 써야 했으니까 더 집 밖에 나가 집필을 할 수 없었다. 전공이 같아서 같은 책을 공유하는 일이 많은 것도 문제였다. 이 선생은 논문이나 평론을 쓸 때 방바닥에 참고문헌을 일목요연하게 세워놓고 쓰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 서재가 작으면 안 된다. 서재는 그의 작업장이기 때문에 작업량이 증가하면 방도 커져야 하는 것이다. (-11-)

첫 아기를 낳고 두 달 쯤 지난 어느날 이어령 씨 제자들이 아기를 보겠다고 모려왔다. 경기고등학교에 부임한 해의 가을이다. 검은 교복을 입은 여드름 난 학생 네댓 명이 맨발로 들이닥치니 방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그 중에 내가 헌책방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찾았다고 좋아하면서 들어오더라고 하는데 그 일은 기억에 없다. (-107-)

뇌물성 선물이 아니어도 김 선생은 누가 무얼 가져오면 , 더 많은 것을 들려 보내기 때문에 빈손으로 가는 손님이 없으니, 뇌물을 준 사람이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선물이 무효화된다고 해서 선생이 그분의 용건을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바깥 선생님께 보고하여 일단 진상을 보상하게 하며, 도울 수 있는 명분이 확실하면 돕도록 부탁을 드리는 것을 잊지 않으니 앙심을 품는 사람이 적다. (-240-)

평창동이 우리를 끌어당긴 가장 큰 매력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사 갈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서울 시내에서 제일 땅 값이 싼 곳이었던 데 있다. A급지가 평당 사만 이천원이었다. 도로보다 지하 일층이나 이층 정도로 낮은 곳에 있는 B급지는 삼만 칠천원이었고, 택지 조성을 안 한 땅은 구천 원밖에 하지 않았다. 삼백평을 사도 이백칠십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동네로 올라오는 초입에 있는 택지조성을 안 한 암반 지대를 아는 분이 샀는데, 양질의 화강암 지대여서 석재 장사가 돌을 사겠다고 나섰다. 땅값이 석재대 값보다 싸서 돈 한 푼 안들이고 삼백여 평의 택지를 얻게 되는 것을 본 일도 있다. (-314-)

1973년 문학사상을 인수하면서 따로 모으기 시작한 특별 통장의 금액이 이십삼 억 원쯤 되었다. 그의 원고료와 인세, 문학사상 수익금까지 모두 합한 총액이다.2001년에 영인문학관을 시작한 나는, 퇴직금과 삼 년간의 월급을 보태어 오 억원의 기금을 이미 문학관에 기증했기 때문에 여축이 많지 않았지만, 내 저축도 다 털어서 건축비에 보탰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통장을 깨려니까 불안이 엄습해왔다. 둘 다 빚을 지고는 못 사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건축비가 모자라서 빚을 졌고, 초과한 부분은 몇 해 동안 분할해서 갚아나갔다. (-375-)

스스로 나의 의지대로 누군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치관, 신념 ,생활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 때로는 욕심이 날 때가 있다. 누군가의 삶을 내 삶으로 바꿔 보고 싶어진다. 바로 고인이 된 이어령 교수와, 강인숙 부부의 학자적 삶이다. 두 사람은 1933년 생 동갑내기이며, 이십대 중반부터 신혼생활을 하여, 이어령-강인숙 부부는 4.19,5.16,6.25 한국전쟁 동란을 거쳐왔으며, 격동의 근현대사를 견디면서 살아왔다. 이어령 교수의 재표적인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있다. 하지만, 그가 쓴 저서들은 익히 1970년대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부부가 결혼하던 날,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부부의 결혼을 축하했다.

전공이 같았고, 강의. 대학교수였기 때문에, 서재가 두개가 필요했다.하지만 결혼 후 가난한 시간강사에 불과했다. 이어령 교수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고,인세가 들어오면서,경제적 자율르 누릴 수 있었다. 1970년대 내 집을 가지기 전까지만 해도, 한 집에서 좁은 공간에서 같이 강의를 준비하고,자료를 모으고, 수업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면서, 지금과는 다른 정감있는 서울 평창동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 단독주택을 지어서, 서재를 두개 둘 수 밖에 없었다. 이어령 교수는 일찌감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1970년대 재산이 이십억이 넘었다. 부유한 삶,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이어령 교수는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4.19 의거를 지나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초대 문화부 장관 자리에 올랐지만, 가족은 권력과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이어령 교수의 평판에 민폐가 될까봐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오해를 사지 않도록 철저히 거리를 두게 된다.

강인숙 교수의 『글로 지은 집』 은 집에 대한 이야기지만 , 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에 있어서, 가화만사성 (家和萬事成,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화목 (和睦)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었다. 집이 편안하면, 가정이 편안하며, 가정이 편안하면, 부부가 백년해로가 가능하다.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본질이며, 존중과 배려, 소중함 속에 고독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부부가 둘이 되어, 하나가 되었지만, 외롭지 않고, 먼저 떠난 베필을 원망하지 않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이 책에 나오고 있었다. 실천하기에는 어렵게 느껴지는 삶이지만, 누구에게나 노력하면, 바뀔 수 있는 삶이다.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정착하면서, 물욕에서 벗어난 삶이 역설적으로 복과 부,행복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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