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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나라 조선 - 그 많던 조선의 모자는 왜 그렇게 빨리 사라졌을까?
이승우 지음 / 주류성 / 2023년 1월
평점 :
조선의 선비들은 의관정제 衣冠整齊를 선비가 지켜야 할 금도로 여겼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관모를 갖춰 썼다. 반상을 가리지 않고 맨머리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상민들도 양반의 삶을 선망하며 모자를 쓰면서도 자신의 신분과 상황에 어울리는 독특한 모자를 만들어 썼다.
조선에서의 모자는 의복의 장식품 또는 장신구의 역할을 넘어 신분과 계급, 직업,나이 ,성별을 상징하고 분별하는 일종의 사회적 코드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유교에서 비롯된 상하 간의 예의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젠더)까지 포함하고 있었기에 모자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느 상징이었다. (-20-)
첫째, 조선의 모자는 조선인의 전통적인 상투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조선 성리학의 윤리관이 더욱 조선의 모자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둘째, 조선인은 신체 각 부위 가운데 유별나게 머리를 중요시하는 특유의 존두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 유학적 선비 사상에서 비롯된 의관정제 의식이 철저하여 의복과 관모를 함께 갖추는데 정성을다했다.
셋째,특이하게도 한반도에서만 계승되었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왕조가 모자 문화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조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왕조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유사한 모자 문화를 누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00여 년이상 유지되었던 고구려, 백제,신라와 고려, 조선은 왕조마다 고유한 문화가 싹 터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누렸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다져진 문화는 단절을 거부하고 스스로 생존하고자 하는 생명력을 갖는다.이를 문화의 지속성이라 한다.문화가 단절된 왕조은 결코 긴 역사를 가질 수 없다.이 문화적 특성이 조선의 모자문화에도 강하게 작용했다.
넷째, 조선의 모자문화는 조선의 엄격한 유교 신분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선의 모자는 계급사회라는 사회체제 아래, 신분과 직업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고 제한해야 하는 사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져 발전해 나갔다. (-50-)
조선 중기에는 모체가 높고 양각도 평직으로 넓었으나, 후기에는 모체가 낮아지면서 양각의 길이도 짧아지고 아래로 굽어졌다. 사모는 흑사모와 백사모 두 종류로 나뉘며 흑사모는 조선의 대표적인 관모로 서민층에서도 혼례 때 신랑이 썼다. 퍼시퍼 로웰과 이사벨라 버드 여사 등 많은 서양인이 사모의 양각을 날개 또는 귀로 기록하며 양각은 왕에게 절대 복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조지 커슨 같은 사람은 사모를 '옛베니스 총독의 모자'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121-)
조선 정부는 풍속을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남녀칠세부동석 과 같은 내외법을 여성의 일상생활에 적용했다.이로 인해 부득이 외출하려는 여성은 너울이나 장옷과 같은 쓰개로 얼굴을 가리고 외출해야만 했다. 조선의 사대부, 양반, 유림이라는 주류 세력은 가부장제를 확립하고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여성들에게 내외용 쓰개를 착용시켜 여서의 사회생활을 극도로 제한했다. 이들은 특히 삼강오륜의 남녀유별을 내세워 조선 여성들을 내외용 쓰개 안에 가두는 등 비인도적인 제도를 조선 내내 철저히 시행했다. (-195-)
갓을 만드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갓은 오로지 갓장이만이 만들 수 있으며 조그마한 흠결이라도 갓장이만이 고칦 수 있는 귀하신 몸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수공예가 결코 아니다. 재료를 다듬어 준비하는 기간도 오래 걸린다. 더구나 갓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최소한 세 사람이 협력하지 않으면 갓을 완성해 낼 수다 없다.그렇다고 이 세 사람이 한 군데 모여서 작업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철저히 분업화가 이뤄지는 분야도 찾기 힘들다. 갓 제작의 분업화는 갓의 수요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또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63-)
단발령을 강행했던 김홍집 내각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무너졌으며 동시에 단발령이 철회되면서 두발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겨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막상 단발령이 철회되었으나 상투를 잘렸던 사람들이 과거의 상투 머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행 초기부터 워낙 강력하게 집행되었던 단발령이 있기에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많은 사람이 상투를 잘렸다. 그러나 상투가 잘린 사람들은 막상 상투가 없어지고 보니, 허전하긴 했으나 그 편리함은 물론 청량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이를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스스로 상투를 자르게 됨에 따라 단발령의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 부 대신들을 포함한 정부의 관리들과 외교관,도시민들을 중심으로 단발이 확산하였으며 근대 교육과 개화 바람으로 단발은 점차 보편화 되었다. (-343-)
『독립신문』 은 상투와 갓을 포기하고 단ㅏㄹ을 하는 것이 근대화를 위한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명제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어서 "못된 옛 풍속을 버리고 문명 진보에 힘써야 한다"라고 강조함으로써 , 조선 문명에서 서구 문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진보의 과정임을 확실하게 선언했다. 상투와 갓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문명 진보의 필수조건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343-)
사극을 좋아했다. 특히 조선 전기,조선 중기,조선 후기로 구분되어 있는 27대 와이 함께 했던 조선의 역사 전체에 대한 사극을 좋아한다. 용의 눈물, 장희빈, 인현왕후, 정도전, 명성황후, 여인천하,동이, 허준,징비록 , 장영실, 대왕세종, 불멸의 이순신 등등 사극을 볼 때마다 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 해석 뿐만 아니라,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의식가 꼼꼼하게 소개되고 있어서,눈에 들어왔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 대한 이미지, 그 이미지가 모자의 나라 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 『모자의 나라 조선』라 했을 때, 오잉?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하면 상투와 갓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무론 여성의 경우 장옷,너울, 쓰개를 써서, 조선의 성리학적 법도에 맞게 살아왔다는 점은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하지만 조선시대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그건 계절에 맞는 모자와 의복이 있다는 것이다.비가 오면 쓰게 되는 우산 모자 갈모가 있다. 그리고 갓을 쓰고 있었으며, 결혼이나 벼슬길에 나섰을 때, 자신의 신분 이 어떠냐애 따라서 모자가 달라질 수 있다.과거에 급제하여 당상관이 되었을 때 쓰는 모자가 다른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결혼할 때는 흑사모와 백사모를 쓰고, 의관을 정제할 때도 그에 맞는 의관과 모자가 필요하다. 지금도 결혼식 폐맥에 조선의 법도를 따른다. 왕을 모실때도 마찬가지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암행어사의 옷과 모자가 다르고, 조선시대에 숨어 살았던 김삿갓 (김병연) 의 모자도 차별화한다. 더군다나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을 하였던 신윤복은 모자와 옷을 바꿔서,자신의 전체성을 고쳐 나갔다. 이후 조선후기로 갈수록, 일본에 의해 지배되었을 때, 단발령이 전격시행되었으며,상투를 자르고, 갓을 쓰는 습관에서 탈피하게 된다. 유교 문화와 삼강오륜에 따라 예의 범절을 강조했던 그 조선시대에는 상황과 조건, 신분에 따라서, 모자를 달리한다. 양반과 상민, 노비와 백정이 쓰는 모자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소위 조선 말엽 일본이 강행한 단발력은 조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을 제거하기 위한 상징적인 쇼맨십이다.그로 인해 조선인들은 그 시대의 불편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낡은 풍습을 버리고, 조선의 근대화를 꾀한다는 일본의 조선지배의 명분이 조선을 스스로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