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라 불린 사람들 - 지능과 관념 · 법 · 문화 · 인종 담론이 미친 지적 장애의 역사
사이먼 재럿 지음, 최이현 옮김, 정은희 감수 / 생각이음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나는 시설이 생기기 전이었던 18세기와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는 백치나 치우로 불리던 사람들이 지역사회의 구서원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가족이나 이웃, 일자리가 있었고 지인들로부터 사랑과 보호,인정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따금 이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그리고 종종 재밌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이들의 지적 결함을 알아차리고 언급하기도 했다. (-10-)

호가스의 그림에는 백치는 다른 하인들처럼 멋진 제복을 입고 있지만 옷이 너무 크고 "단추가 삐뚜름히 채워져 있다." 또 그의 옷 속에 있는 휘어진 두 다리른 "무릎을 굽혀 절을 하며 존경심을 표현하는 자세가 절대로 불가하는 것"을 나타낸다. 관람객에세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는 약제사가 백치 하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는 모습에 있다. 따귀 때리기, 발로 차기, 주먹질 같은 폭력은 18세기 일상에서 흔히 일어났지만, 얼굴을 때리는 행위만은 금기시됐다. 가해자의 신분이 무엇이든 "사람 얼굴을 때리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으며, 얼굴을 맞은 사람 역시 동물이나 다름없는 지위로 강등했다. (-94-)

원덤 사건은 1860년대 백치 여부를 둘러싼 중요한 애매모호한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다. 백치에 대한 관념은 18세기 초에 정립된 모습 그대로 유지됐다. 즉, 백치는 고립된 삶을 살며 자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일상적인 거래 활동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용당하기 쉽고, 공통된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고, 이따금 연민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백치의 또다른 모습은 가족의 인내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대상이자,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이용당하지 않도록 보호받고 인간성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174-)

의료인들은 백치에 대한 통제 및 관리, 치료할 권리를 주장하고,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백치 상태와 관련된 의학적 설명을 체계화하기 시작햇다. 항상 이런 설명에는 '거칠고' 혐오감을 주는 비참한 백치들을 둔하고 활용되지 않은 두뇌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208-)

1859년과 1861년에 밀이 자신의 책에 썼듯이, 당시 사회에서는 백치들을 시서로 보내는 일이 진행중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종교계와 정치계,의학계, 사회여론 등 사방에서 백치를 공격하는 분윅기가 형성되면서,이들은 점점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됐다. (-279-)

정신지체의 무능력이 '지적인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진다는 사실은 그들의 결함이 실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즉, 그 결함이 지적 능력의 부족이지 사회적 능력의 부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구 결과, 실제로 전 환자들에게서 '지적' 능력과 '사회적' 능력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이들의 일상에서 두 가지 능력은 지적 능력과 사회적 능력인데,이 둘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55-)

정신지체, 혹은 백치라 부르는 이들에게 우리는 멍청이,문맹, 얼간이로 다양하게 낙인을 찍는다. 바보, 얼간이, 멍청이, 문맹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할 때가 있다.그래서 그들은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격리하거나, 시설에 가두거나, 나오더라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케어하듯, 백치를 사회에서 케어할 수 있는 책임과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으며,사회적 보호를 받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과거에 백치에 대한 인식은 열악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 백치를 다루는 방식은 거칠었고, 혐오하였고, 방치하였다. 그러나 제레미 멘담의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같은 저서가 만들어지면서, 백치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사회에 반영될 수 있었다. 문학에서, 백치를 주제로 한 작품이 소개됨으로서, 백치는 배척의 대상이 아닌 함께 해야 하는 대상, 연민과 보홀르 받아야 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백치는 일반인과 다르게 사회적인 역할을 하기 힘든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하였다. 피아니스트 이희아, 마라톤를 좋아하는 배형진과 같은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며, 사회복지나 인권에 백치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백치에 대한 처우를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시점에서, 양차 세계대전이 나타남으로서, 우생학이 도래하였다. 나치 독일은 인종청소를 할 때, 백치에 대해서, 장애에 대해서, 처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으며, 학살이나 제노사이드의 형태로 변경하였다. 이후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으며, 백치에 대해서, 중산층의 사회적 인식은 전환되었다.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서을 강조하게 된다. 공격의 대상이 아닌, 보호와 교육, 훈련의 대상으로 바뀌었으며, 일반인들의 사회적 규칙과 원칙을 그들에게 주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떤 범죄에 대해서, 무죄와 유죄의 기준에 대해서,백치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에 따라서,법을 위반하더라도, 백치에 대해서,관대한 이유는 그들의 지적 수준이 어린이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