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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 - 자유와 분열의 이탈리아 잔혹사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하인후 옮김 / 무블출판사 / 2022년 12월
평점 :
야만족의 침략을 받은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다른 속주들은 사실 매순간 비참했지만, 그래도 가장 비참했던 때는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통치가 시작된 395년부터 데오도리쿠스가 왕위에 오른 493년까지였다. (-38-)
이 무렵 피렌체의 상황은 매우 나빴다. 왜냐하면 거만해진 구엘프 귀족들은 더 이상 행정장관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매일 많은 살인과 다른 폭력들이 발생했지만, 귀족의 총애를 받는 가해자들은 누구 하나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3-)
진실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는 이미 타락했거나 남을 타락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젊은이는 게으르고 노인은 음탕하며,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나쁜 풍습에 젖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법들은 악용되어 그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렸기에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237-)
"보시다시피 이제 이 궁은 여러분의 궁이고, 이 도시는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자, 앞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가 정의의 곤팔로니에레이자 지도자가 되어, 그가 좋다고 판단하는 대로 자신들과 도시를 다스려 달라고 대답했다. 1378년 7월 22일. (-272-)
이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피렌체 통치자들은 매우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공작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고 협정도 잘 지켜지고 있었으므로,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되찾을 기회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즉시 리날도 델리알비치와 팔라 스트로치를 이 임무를 수행할 최고사령관으로 뽑아 볼테라로 보냈다. (-347-)
백작은 그들의 두려움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작 가문과의 결혼에 대한 백작의 열망은 계속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고, 이 욕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공작은 자신을 상대로 군을 움직이지 않는다면,머잖아 백작의 소망이 꼭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을 반복해서 백작에게 이야기했다. (-443-)
자신을 부유하게 그리고 적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전쟁을 벌이는 자들의 일관된 목적이며, 또 그래야 합리적이다.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 적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승리를 추구하거나 정복을 열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승리하고도 빈곤해지고 정복하고도 약해지면, 전쟁을 벌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목적을 넘어선 것이다. (-492-)
그렇지만 겨울이 십작되었고, 군대를 숙영지로 철수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공작은 르네 왕의 숙소를 피아첸차에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1453년의 경둘은 아무 움직임 없이 지나갔고, 새봄이 오자 공작은 다시 들판으로 나가 육지에 있는 베네치아의 영토를 전부 빼앗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566-)
피렌체가 이런 혼란 속에 있는 동안 최고 행정관직을 다시 선출해야 할 때가 찾아왔고, 니콜로 소데리니가 정의의 곤팔로니에레로 임명되었다. 저명한 시민들과 일반 대중이 뒤섞인 엄청난 수의 인파가 그를 다라 시뇨리아 궁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도중에 조국의 안위와 자유가 그에게 달려있음을 나타네는 올리브 화관이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지는 일도 있었다. (-620-)
당시 피렌체는 전쟁의 재앙 뿐만 아니라 끔찍한 전염병으로도 고통받고 있었다.이 전염병은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고, 많은 시밍이 죽음을 피해 시골의 별장에 가 있었다. 그런데 이 피신이 그 패배를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일로 만들었다. 전염병을 피해 발 디 페사 Tavamelle Vali di Pesa 와 발델사 Baarberion Val d'Elsa 의 별장에 내려가 있던 시민들이, 패배의 소식을 듣자마자 자녀와 재물은 물론이고 농장의 일꾼들까지 다 데리고 최대한 빨리 피렌체로 돔방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적들이 언제라도 성벽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공포를 도시에 퍼뜨렸다. (-710-)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1469.5.3. ~ 1527.6.21) 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출발점 이었다. 로마국가가 동서로 분열되고, 이후 유럽 중심에 세계는 중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럽은 중세의 암울한 시기를 건너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르네상스 3대 거장이 있었던 시기가 15세기 전후였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1469.5.3. ~ 1527.6.21) 또한그들과 함께 호홉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나가면서, 도시국가 형태로 존재하였던 피렌체 공화국에서 정치와 외교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그의 일대기를 살펴 본다면 상당히 암울했다. 젊은 나이에 출세하였지만, 곧바로 꺽이고 말았으며, 피렌체가 처한 현실,귀족들의 탐욕과 타락,게으름,무책임의 실체를 보고 말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쓰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과물이다.비록 그는 자신이 쓴 저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피렌체의 이단아로 남았지만,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바로 그가 쓴 피렌체사 덕분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 『은빛 피렌체 』 를 통해 로마의 도시 국가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백제의 잊혀진 수도 부여를 피렌체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피렌체의 역사는 역사와 정치 문화 면에서 최고의 정점과 최악의 상황을 동시에 마주하고 만다.
즉 르네상스 시대에 이해하기 전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상황을 엿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이탈리아는 분열되었으며, 지배자가 난립하고 말았다.그 과정에서 교황령, 밀라노공국, 베네치아공화국, 나폴리왕국, 피렌체공화국,제노바, 피사, ,볼료냐 로 분열되고 있었으며, 전쟁과 전염병의 혼란과 공포속에 살아야 했다. 전쟁으로 부를 얻고, 적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적의 전리품을 획득하였으며, 병사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약탈과 습격을 일삼게 된다. 마치 무정부 상태에 놓여진 것처럼 보여질 정도로 혼란스런 시기였으며, 서서히 분열 상태에 놓여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문제들이 해결해 나가는 과도기 상태를 이 책에서 이 책 『피렌체사 』에서 재확인할 수 있으며,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인해 형성된 ,유럽 예술의 정수, 르네상스 미술의 찬란함은 거져 얻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