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드
마윤제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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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는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 여자들이 고무장갑을 들고 우리 집으로 몰려온 것이다. 새 엄마가 집에 온 뒤에 마을 여자들이 우리 집을 찾아온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날 시골집 마당에서는 수육과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16-)

그가 책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건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을 읽고 난 뒤부터였다. 도서관에는 그동안 대출하고 반납한 책의 목록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록이 아니었다. 도서관의 필요에 따라 작성된 목록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은밀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나 이후 서가에서 자신의 표식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야릇한 희열을 느꼈다. 거대한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의 비밀을 혼자만 아는 듯한 기쁨이었다. (-41-)

『토성의 고리』는 유령 책이 아니었다. 엄연히 정식 절차를 거쳐서 도서관에 반입되었고 독일 작가들의 서가에 들어갈 수 있는 '853-제42ㅌ'이란 고유 넘버를 부여받았다. 만약 『토성의 고리』가 유령 책이 되어 서가를 돌아다니고 있다면 그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었다.이는 곧 도서관을 좋아했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였다. (-43-)

유지는 온종일 항구 곳곳을 돌아다녔다. 선창에 정박한 어선이 몇 척인지 세어보았고 활어 직판장을 돌아다니며 빨간색 고무 양둥이에 담긴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들을 구경했다. 미로처럼 복잡한 공동 어시장을 빠져나와 야구 연습장을 기웃거렸다. 또 자기 또래 아이들이 단정한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기도 했다. (-68-)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형체가 어른거렸다. 유지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잠영했다. 물빛이 탁했다. 뿌연 시야에 여자아이의 하얀 발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서 팔을 제압하는 순간 여자아이가 얼굴을 홱 돌렸다. (-89-)

권이 우리 앞에 놓인 소주잔을 채워주며 설명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수육 한 점을 입에 넣였다. 잡내를 잡기 위해 넣은 통마늘과 월계수 잎 냄새가 났다. 소주 한 병이 바닥날 무렵 권이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95-)

조류를 밀려온 스티로폼 조각이 방위를 때렸다. 해안 곳곳에 쓰레기들이 조개처럼 박혀 있었다. 여자는 남은 콜라를 한 방울 마신 다음 바위에서 일어났다,.해안을 서성거리며 가치를 상실하고 버려진 쓰레기들을 들여다복던 여자는 천천히 돌아서서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몸으로 섬의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123-)

섬을 짓누른 무기력에 깔린 사람들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출솔에서 흘러나온 불비치 섬처럼 떠 있었다. 여자는 안개 사라진 골목을 지나서 민박집에 들어섰다. (-135-)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드곳에도 씨알 굵은 옥수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옥수수 더미에 빠져나온 가죽끈을 잡아당기자 아내의 핸드백이 딸려 나왔다. 핸드백에는 손때 묻은 립스틱 하나가 들어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안쪽 지퍼를 열어보니 결혼식 사진이 있었다. 그느 자신과 아내의 아름다운 시절이 박제된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150-)

다음 날 오후 현기는 빌린 승용차를 몰고 해안선을 달렸다. 굽이치는 해안선을 따라 풍력 발전기가 성벽처럼 우둑 서 있었다. 그 사이로 투명한 햇살을 품은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그저 보고 느낄 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동쪽으로 나아갈수록 빛은 두터워지고 바람은 약해졌다. (-183-)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아마도 예닐곱 살 때였을 것이다.놀이터에서 정심없이 놀다 보니 여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이들이 북적거리던 놀이터는 대여섯 명만 남았다. 나머지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현기는 재덕이와 단둘이 남았다. (-191-)

10일 전 그가 탄 버스가 해안도로를 달려간 끝에 암해안의 한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곧바로 터미널을 나선 그는 과장 한구석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서서 K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스무 번이나 간 끝에 졸린 듯한 남자 목소리가 흐러나왔다. k의 이름을 대자 사내는 몇 번이나 의심스런 투로 되묻고 확인했다. (-210-)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작업복 두 명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217-)

방파제를 지나자 해변에 한 무리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아이들이 해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손차양을 만들어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을 바라보았다. 해변을 달려가는 아이들의 발에서 하얀 먼지가 풀썩거렸다. (-233-)

마윤제 작가의 작품 세 편을 읽었다. 순서대로 보자면 청소년 소설 『달고나, 예리!』,장편소설 『바람을 만드는 사람』,『8월의 태양』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쓴 장편 소설 두 편을 다 읽을 수 있는 운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세번째 소설집 『라이프가드 』 에는 여덟 편의 단편 소설를 배치시켜 놓았다. 그 여덟 편의 단편소설은 『강江』, 『도서관의 유령들』, 『라이프가드』, 『어느 봄날에』, 『버진 블루 라군』,『옥수수밭의 구덩이』,『조니워커 블루』,『전망 좋은 방』이며, 장소나 사람, 느낌과 감정, 색체, 스토리가 각기 중복되지 않는 독특함이 잘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우리 삶을 깊숙히 관찰하고, 수채화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세세하면서,정교한 디테일을 살려내고 있다.

여덟 개의 단편 소설에는 여덟 편의 삶이 담겨졌다.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하나의 단편이었다. 그러서인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감정과 느낌, 이성과 감성까지 담아내려고 애쓴 흔적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장소와 시간이 서로 거미줄처럼 단단하게 연결되는 독특함이 있으며, 누군가를 보고, 누군가의 행동과 동선, 그 찰나의 순간에 반영되는 소소한 느낌과 감정까지 잘 살려내고 있었다. 1990년대 , 우리에게 익숙한 아날로그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으며, 조금씩 모르게 사라지는 우리의 기억들을 개봉하고 있었다. 우리의 어떤 장면을 보거나 어떤 우연찮은 일이 생길 때,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추억이 있다. 그 추억조차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어떤 사무이 나의 어떤 추억과 엮이고 한다. 여관, 여인숙, 민박, 어촌에서 느껴지는 갈매기 소리와 바다내음새까지,적적한 바다에서, 홀로 낚시를 드리우는 중년을 기억나게 한다. 색과 인간의 감정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나가며, 인간의 희노애락과 결부시하였다, 작가 마윤제님은 봉화 출신으로서,자신의 어린 시절, 오롯히 느껴지는 농촌, 시골의 고유한 정서를 잘 담아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 보고, 깊이 관찰하면서, 그 안에서, 사람의 행동 하나에 담겨진 의미와 가치, 감정과 느낌을 잘 살리고, 작은 것 하나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 독특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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