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외척과 환관의 국정 농단으로 400년 제국이 무너지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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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는 한나라의 숙적인 흉노를 견제할 목적으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여러나라를 방문하게 했다. 장건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13년만에 도성 장안으로 돌아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 인도 등지에서 번성한 많은 나라를 한나라에 소개했다. (-11-)

유방은 또 충신들의 간언을 수용하는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가 항우보다 먼저 진나라의 도성 함양의 아방궁을 점령했을 때 수많은 금은 보화와 천하의 미녀들을 보고 넋이 나갔다. 시골 정장 출신이 하루아침에 진시황제가 남긴 아방궁을 차지했으니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당장 미희들을끼고 천하를 얻은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번쾌와 장량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보물과 재화로 가득한 창고를 봉쇄한 후 패상으로 회군했다. 만약 이때 그가 아방궁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지냈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80-)

오늘날 여태후는 당나라의 무측천, 청나라의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로 악명이 높다. 그녀는 남편 한고조를 개국 황제로 만드느 데 일정한 공적을 쌓은 여걸이었다. 한고조도 조강지처인 그녀를 중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하여 그녀의 헌신에 보답했다. 하지만 점차 여태후를 멀리하고 젊고 아름다운 척부인에게 매료되어 여태후의 소생인 태자 유영을 폐위하려고 했다. 이는 여태후의 분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07-)

한무제는 죽은 후에도 곽거병이 자신을 지켜주기를 바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한나라는 곽거병 사후에 더 이상 고비사막 이북 지역으로 사라진 흉노를 공격하지 못했지만, 하서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서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 (-180-)

한무제의 대외 원정은 우리나라의 고대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주(周) 나라 때 무왕(武王) 이 상(商)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 를 지금의 대동강 유역과 평양 일대에 조선의 왕으로 책봉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자 조선은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왕의 계보를 40 대(代) 에 걸쳐 이어 내려왔다. (-199-)

"효도로 백성을 인도하면 천하는 저절로 다스려진다. 그런데 지금 백성들은 상보글 입어야 하는 불행을 당했는데도 관리들이 그들에게 요역을 시키기 때문에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여 효자들을 애통하게 한다. 짐은 이를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앞으로는 조부모와 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요역을 면제해주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잘 치르게 함으로써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하라!" (-257-)

원시 5년 공경, 대부, 박사 등 902명은 왕망에게 구석 (九錫) 을 하사하여야 한다고 상소했다. 구석이란 거마(車馬), 의복, 악기, 주호(朱戶,붉은 색을 칠한 대문), 납폐(納陛: 전용계단),호분(虎賁),부월(斧鉞),궁시(弓矢),거창(秬鬯) 등 천자가 큰 공훈을 세운 제후나 공시에게 특별히 하사하는 아홉 가지 진귀한 물건을 말한다. 구석은 한나라 역사 405년 동안 왕망과 조조(曺操) , 두 사람에게만 하사되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었다. 훗날 구석을 받은 자는 왕조를 전복하고 새로운 황제로 등극함을 암시했다. (-324-)

광무제 유수는 한고조 유방의 '카리스마'가 없었지만 유방과는 다르게 생명 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지략은 조조만 못했지만 조조와는 다르게 간교한 술책을 부리지 않았다. 영웅적 풍모는 당태종 이세민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이세민과는 다르게 형제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는 황제였음에도 잘난 체 하지 않고 신하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으며 여민동락 (與民同樂)했다. 물론 그도 결점이 없지 않았다. 늘그막에 도참설에 빠졌으며 환관들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었고 지방 호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결점들은 그가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옥에 티이다. (-402-)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비방했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합니다.한무제의 공적과 과오는 이미 한나라 역사에 해와 달처럼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책에 수록된 사실을 말하는 것은 비방이 아닙니다. 무릇 제왕이 먼저 선량하지 않으면 천하의 악행이 그에게 집중될 것입니다. 이는 모두 그렇게 된 원인이 있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죄를 추궁해서는 안 됩니다." (-433-)

이때 환관 19명은 덕양전의 서종루에서 비밀리에 회합했다. 그들은 중상시 손정을 우두머리로 삼고 궁중 정변을 일으켰다. 장대문(章臺門)을 급습하여 강경, 유안, 진달 등 염태후의 수족들을 살해하고 황궁을 장악한 후 전격적으로 제음왕 유보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유보의 나이는 10세였다. 유보가 후한의 8대 황제 한순제 (漢順帝) 이다. (-490-)

양기, 손수, 양불의,양몽 등 양씨 가문의 핵심 실세는 모두 자살했다. 양씨와 손씨 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처형되었다. 양씨 가문에 빌붙어 패악질을 한 고위 관리 수십 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양기와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조정관리가 300여명이나 되었다. 조정이 일시에 텅 비어 있었을 정도로 결원이 심각했다. (-519-)

동탁은 아주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본성을 마음껏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태후를 독살한 후 그녀의 시신을 한영제의 능묘인 문릉(文陵)에 합장하는 틈을 타서 부하들에게 매장한 금은보화를 도굴하게 했다. 부하들이 작양 부호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해도 모른 척했다. 낙양이 무법 천지로 변했다. 시어사 요룡종(擾龍宗)은 몸에 칼을 찬채 동탁을 배알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동탁은 그를 때려죽이게 했다. 또 이미 사망한 하태후의 오빠 하며(何苗)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토박을 낸 후 원림에 버렸다. 그의 어머니 무양군 흥(興) 도 살해된 후 나무 울타리 아래에 버려졌다. (-577-)

건안 13년(208) 조조는 조정 권력의 핵심이었던 삼공(三公)의 관직을 페지하고 승상부(丞相府) 를 설치한 후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조조는 대군을 이끄고 남정(南征)을 단행했다. 장강(長江)의 적벽(赤壁 :호북성 적벽시 서북쪽에 위치)에서 손권(孫權 .182~252) 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대패했다.이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위(魏)나라와 오(吳)나라 그리고 촉(蜀) 나라의 삼국이 병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92-)

역사학자 강정만의 『한나라 역대 황제 평전』 이다. 이 책을 읽기 전 ,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을 읽은 바 있으며, 앞으로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같은 시리즈를 읽어본다면, 중국 역사 계보와 흐름을 깨우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국은 유목민족 흉노,돌궐,위구르에 대항하여, 만리장성을 쌓아서, 외침을 방어하는데 매진하였다. 물론 한반도 고대의 역사에서, 위만조선,기자 조선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의 역사에서 빠진 역사들, 지워진 역사들을 중국의 역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그 역사에 대해서 고대사의 역사,가야의 역사는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진나라 시황제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소위 태평성대의 국가의 기틀이 만들어졌다. 이후 기원전 209년 진승 오광의 농민의 난으로 인해 진나라가 멸망하였으며, 유방과 서초패왕(西楚覇王) 이라고 스스로 지칭하였던 항우의 초한전(楚漢戰)이 기원전 206년 시작되었으며, 유방의 승리 이후, 한나라가 세워졌으며, 중국의 기틀이 만들어진다.

한편 중국은 한나라가 지배하는 곳이었다.하지만 하나라를 위협하는 세력,흉노 (BC209~AD155) 이 있다.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하였던 흉노 족을 한나라는 오랑캐라 불리었고, 외침을 막기 위해, 흉노족과 전면전을 치루었으며, 이제 사라진 나라가 되고 만다. 한나라에 대해서,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전한 (BC206~AD9),후한(AD25~AD220) 사이에 신나라 왕망(AD9~AD25)이 신나리를 세워 잠시 중국을 지배한 바 있다. 특히 중국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위만조선을 복속 시켰던 한나라 5대 황제 한무제가 있으며, 고구려는 제후로 격하-왜곡한 바 있다, 최근 들어서,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의 역사와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통합, 왜곡하려 했던 이유도 이러한 역사의 맥락 속에 함께하고 있다..

한나라는 환관의 나라다. 환관이 지배하는 나라, 십상시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떠들썩한 국정 혼란, 국정농단에 대해서, 척결을 외치고 있는 명분에서 보듯이, 한나라 400여년의 역사 속에서도, 국정 농단이 있었으며, 나라를 큰 혼란기에 빠져든 바 있다. 이후 동탁과 여포에 의해, 한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황건적의 난으로 한나라는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다.이후 위촉오, 세나라 삼분지계가 시작되었으며,한나라의 마지막 왕 한헌제 유협을 대신하여 , 승상이라 지칭하였던 조조가 위나라를 세워 삼국 통일을 이룬 역사가 있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와 중국본토를 차지하려는 유목민족의 외침 역사, 분열과 반목, 그리고 국정혼란과 국정농단의 역사가 중첩되어 있으며, 중국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성리하게 근간을 둔 유학을 세운 이유도 분열의 역사를 잠재우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함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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