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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을 보려 노력합니다
안인숙 지음 / 오송숲 / 2022년 10월
평점 :
가을엔
가을엔
기도하듯
유서를 쓰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사치이고
고맙다는 말도 거추장스럽기만 한
담백한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싶다
아끼는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잘 살아' 면 족하지 않을까
유머를 곁들인 짤막한 인사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가을엔 유서를 쓰듯
나를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13-)
나는 구석이 좋아요
나는 구석에 앉으면 마음이 편했다
내가 작아져서 조그맣게 되어도
내가 조금은 남아 있을 것 같은
구석이 편했다
울음이 창백해져서
하얗게 떨어질 때도
구석에 있으면 남모르게
슬픔 한 줌 정도만
적실 수 있어 안도했다.
나는 구석이 좋았다
나를 구석에 앉히고
사라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믿어져서 좋았다
가슴을 타고 온 따듯한 숨소리
시공을 넘어온 평온함이
웅크린 자들을 위해
머무는 것 같아
나는 구석이 좋았다. (-15-)
어미 마음
널 품에 안으며
난 우주에 안겨 있었지
연약하고 작은 널 안으며
난 네게 온 세상이 되고
넌 내게 우주를 알려줬어.
아가야
무럭무럭 자라
훨훨 나르렴. (-29-)
담쟁이고 단풍 드는데
작은 손을 뻗어
살금살금
다른 몸체에 딱 붙어서
기어오른다
숨을 쉬고
넓은 잎으로 자라고
또 앞으로 옆으로 전진
하며 뻗어나간다.
좀체 물러설 줄 모르던
생명력
담쟁이도 단풍이 드네
한 뼘은 더 뻗어나가려는 듯
딱 붙어서
그렇게 겨울을 맞겠다.(-31-)
비 온 뒤에
비온 뒤엔
촉촉한 기쁨이 있다.
슬픔과 기쁨 어느 중간쯤
촉촉한 기쁨이
꽃 위로 나뭇잎 위로
방울방울 어려 있다
슬픔이 비처럼 내려도
이슬처럼 어리는 기쁨은
언제나 있다니
신기하지
순도 맑은 슬픔은
비 온 뒤엔
촉촉한 기쁨으로
어린다. (-39-)
바람
보이지 않는 바람이
살갗을 스치면
투명한 바람이
내 옷자락을 가볍게 날릴 때
비로소 믿게 되는
바람의 노래
풀잎이 쓰러지면
거센 바람이 나무를 흔들 때
비로소 들리는
바람의 울음
바람이 내게
어리석다고 한다. (-51-)
얼음 위를 걷기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주고 한 걸음 한 걸음
얼음 위를 걷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미끄러질 수 있으니
꽈당 하며 엉덩방아를 찢던
짜릿한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얼음 미끄럼을 타던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나도 예전에 그 아이였다는 게 신기하다.
어른이 되면 무서운 게 많아진다.
하루하루 얼음 위를 걸으며
발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뭉치고
겁에 질린 어른이 되었다.
제길,
살얼음이다. (-79-)
그냥 그렇게
그냥 그렇게
시간 속에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는 마음으로 반짝였는데
연극에서 웃음소리가
페이드아웃되듯
그렇게 희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삶에 치여 무심함으로 흘려버렸거나
풀지 못한 서운함과 함께
세월의 조류에 떠밀려 멀어졌거나
그러다 너무 멀리 떠내려가
사라져 버린
이럴 때 우리는
인연이 다했다고 하지만
뭔가 씁쓸하고 쓸쓸한
그냥 그렇게 (-87-)
그리움이 지나간 자리
구름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리움이 지나간 자리
잔물결이 칟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자리에
우리는 늘 서 있다.
요란한 비바람이 불던 날이
언제였던가
붉은 꽃잎이 눈물처럼 떨어짇건
그날은 또 언제였던가
기억은 그리움에 밀리고
그리고 언제나 그리움은
잔물결처럼
영원의 대지로 흘러간다.
우리는 늘 그리움이 지나간 자리에
서 있는데
왜 몰랐을까?(-98-)
평화 3
나를 이해하는데고
평생이 걸리거나
결국 이해 못하고 떠날 수 있겠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겠어
그래도 이해해 보려는 마음
용서해 보려는 마음
용서받고 싶은 마음
그렇게 조금씩
평화로워졌으면 좋겠어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평화롭지 않아
놓아줍시다.
점점이 잊히다
하얀 도화지처럼
기억되더라도
그렇게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어. (-105-)
시집 『뒷모습을 보려 노력합니다.』에는 안인숙 시인이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지곤 한다. 내성적인 성격에 조용히 있고 싶어하는 안인숙 시인의 마음, 구석이 좋다고 말하는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남들에게 자신의 삶을 돋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되면 담백한 유서를 남기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 공감이 깄던 이유는 시를 낭송하면서 시에 나의 마음이 투영되고 있어서다. 즉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주어진 데 로 살겠다는 의지가 암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시적 메시지였다. 그것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취할 것은 취하되 집착에서 스스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할 수가 없다.
그애서 시인을 시를 쓸 때, 사람을 상당히 관찰하고,그 관찰에 자신의 사유를 넣고 있음이 보인다. 삶의 근원적인 물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강 하는지 알아가고 싶어 지면, 나이, 세월, 삶과 죽음이 시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려 노력합니다.』에서는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거다. 즉 그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 뒤에 숨어있는 뒷모습에는 그 사람의 꾸미지 않는 모습이 있다. 완벽한 성햐을 지닌 사람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그 뒷모습을 아는 순간,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 태도가 이해될 수 있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때로는 무례하고,오만해도,그를 용서할 수 있는 준비나 태도를 갖출 수 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생겨나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내성적이지만, 단단한 그 마음, 시인은 하늘을 보면서 구름이 지나간 그 흔적들을 잊지 않는다. 그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사물이나 매한가지였으리라,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고 있으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얼음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우리의 세월이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신의 시에서 『나이 드는 것 』에 눈길이 가게 되었으며, 삶에 대한 시인의 관조와 체념이 느껴지고 있으서 쓸쓸함과 염세주의를 상기시키곤 하였다. 삶이란 결국 잘 살아가고 ,포기하지 않고, 잘 마무리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