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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ㅣ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평점 :
유목민들은 목축을 기초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완전하게 자급할 정도의 생산력을 갖출 수 없어 자체적으로 하나의 경제 단위를 만들기가 어려웠다.따라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유목민들은 고도로 발달한 문화와 가력한 경제력을 가진 정주 농경 사회를 압박해 자신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충족시키려고 했다. (-16-)
'돌궐'이 중국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540년경으로 사위의 장군이었던 우문흔이 이들을 격퇴한 것에 대한 기록이가.이렇게 540년경부터 돌궐의 움직임이 나타난 사실은 주목되나 여기에 기록된 돌궐이 과연 유목 국가를 건설한 아사나와 관련이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또한 542년 경 우문측이 수주를 약탈한 돌궐을 물리친 것에 대한 기록 역시 우문측이 활동했던 수주가 오르도스의 동남쪽으로 항허에 인접한 곳이라는 점에서 아사나의 활동 무대인 몽골의 서부 지역과 거리가 있다. (-118-)
이렇게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222-)
마침 성 서족에 일릭 카간과 퇼리스 카간이 1만여 기병을 이끌고 나타나 지대가 높은 곳에 진영을 갖추자, 이세민은 이를 막기 위해 직접 1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아가 이들을 위압했다. 이 과정에서 이세밍는 퇼리스 카간에게 사신을 보내 형재가 되기를 약속함으로써 일락 카간과의 사이를 이간하려고 했다. (-316-)
이때 카프간 카간은 무주의 지원을 받던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 부락들을 추격해 이들의 복귀 의지를 꺾음으로써 초원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이것은 초원의 안정만이 아니라 주변으로의 확장 내지는 무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카프간 카간은 국가의 체제를 안정시킨 다음 , 초원 주변의 세력들을 장악해 과거와 같은 판도를 다시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424-)
돌궐이 현종의 1차 북벌 시도를 좌절시키고 오히려 당조와의 화친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동부와 서부에서 정략적으로 당조를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중종이 돌궐을 포위하려고 했던 것처럼 , 역으로 돌궐이 당조를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할 정도로 국제 질서의 중심축이 되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470-)
텡그리 이넬 카간은 부왕이 외튀겐에서 당조와 교역을 하라고 한 유훈에 따라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 당조의 위협에서 벗어나 국가를 발전시켜야만 하는 모순된 숙제를 풀어야 했다. 그는 부왕 사후 자신을 짓누르는 엄중한 현실 속에서 권위를 확립하고 나아가 유목 세계를 다시금 통합해내기 위해 먼저 당조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려고 했다. (-549-)
따라서 돌궐은 720년대 이후 할 수 없이 당조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에 포섭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처럼 초원의 유목 국가는 물자 공급과 이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안전한 교통로 모두를 완전히 장악해야만 제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궐은 이것을 이루어낼 만큼의 충분한 여유를 갖지 못해 거대 유목제국으로 급속하게 발전한 이후 항상성을 갖는 체제로 전환해 안정시키는 데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95-)
돌궐은 고대 터키의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와 맞섰으며, 칭기스칸 이전에 퀴르크 족이 유목민족으로서 생존을 위해,공동체를 만들고, 나라의 기틀을 견고하게 만들어 냄으로서,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담보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추위와 배고품에 사로 잡혀 있었던 튀르크인은 ,몽골 초원에서 탈출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540년 경 , 중국의 역사 속에 기록되었다. 실제로 돌궐족의 역사는 터키의 약사 속에 포함되고 있으며, 우리의 역사에서는 을지문덕 장군과 이후 이세민의 침략전쟁 속에 간간하 돌궐이 언급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약사적 흐름 속에 돌궐족을 잠시 언급해쓸 뿐이다.
돌궐은 유목민족이다. 실제로 생존을 위해 농경사회르 받아들이고 살아왔지만, 법과 제도,관습과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말을 이용하여,기미민족으로서 다른 영토를 넘나들었으며,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에 자주 언급되었다. 침략전재의 시작은 유목민족의 생존을 건 사투였다. 이처럼 돌궐 족은 중국의 정사에 올라오곤 한다. 힘이 있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서를 유라시아 유목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적 狄,정령 丁令, 고차로 불리었으며, 5세기를 지나면서 돌궐로 굳어지게 된다. 이후 그들의 거주지는 시베리아 중부에서, 바이칼호 호수, 몽골 초원을 거치면서, 잔쑤성, 톈산 산맥, 무칸 카간 시기에 제국으로 확대되었다. 즉 터키의 역사의 시작은 돌궐이 건국의 역사의 시작이며, 흉노에 복속되거나 독립된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돌궐은 중국 한족의 입장으로 볼 때, 우리가 일본을 왜라 불리었던 것처럼, 그들의 입장에선 골치아프고 미개한 종족으로 치부하였고,실제로 오랑캐라 불리게 된다.하지만, 책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를 읽는다면,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문명사에 유목민족으로서 돌궐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생존 법칙에 따라서, 농경 사회 국가의 법과 제도, 관습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정주여건을 개선해왔다.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통과 교역의 중요서을 일찌감치 이해하였으며, 유목민족으로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지만 , 자원을 이동하여 돈을 버는 상인으로서 큰 역할을 해 온 것은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여전히 우리에겐 낯설은 나라 돌궐, 삼국지에 나온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돌궐이 유목민족으로서 역사의 중요한 주축이 되었기에, 몽골의 칭기스칸이 유럽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조건을 갖츨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고대 고구려의 기마 궁사의 모습이 동굴 벽화에 그대로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유목민족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되어,지금과 같은 형태의 나라, 항구적인 역사를 온전히 간직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