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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 피 ㅣ 걷는사람 시인선 70
이주송 지음 / 걷는사람 / 2022년 10월
평점 :
풀씨 창고 쉭쉭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나와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 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 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 섬에는 국제종자 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 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산과 저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은 움튼다. (-17-)
짧은 ,숲 한 권
연필 한 자루는
짧은 책 한 권이다
한 계절쯤은 충분히 가꾸고도 남는다.
이를테면 마침표로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와 빗방울 다람쥐가 먹고 버린 빈 껍질들을 재사용할 수 있다.
겨울은 지우개로 쓰면 적당하다.
이 지우개는 유독 푸른색을 잘 지운다
간혹 부러지는 연필심은 목차의 한 단락쯤 될 것이다.
연필읊 깎고 난 찌꺼기는 굴뚝 하나로 우직하게 겨울을 나는 집의 화목보일러 땔깜으로 쓸 수도 있다
사실 연필은 기억의 길이다 나무였던 기억, 지층이었던 기억이 풀어지면서 울창한 숲에 이른다 가장 두려운 것은 톱질 소리다 나무가 연기로 연기로 짧아지면서 챙기는 글귀들, 그 안에는 겨울잠 자는 동물의 은신처가 있고 고라니가 누웠다 간 덤불의 흐적과 장끼의 날개가 딛는 기류의 계단이 있다
숲 한 권을 다 쓰고 난 몽당연필은
동네 작은 고원이나 가로수가 되기를 자청할 것이다.
지금도 내 필통 속엔 달그락거리는 숲이 자란다.
연필심에 침을 묻히면 그 진한 토끼들이 흘러나온다. (-33-)
머리를 맞대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서로가 가진 물음표를 나눈다
또 서로가 보유한 느낌표를 세어 본다.
물음표는 늘 느낌표보다 많다
물음표를 오래 두면 그곳에선 느낌표가 돋아나오거나 아니면 바짝 마른 열매처럼 쪼그라든 물음표가 된다,
그런 의문은 몇 년을 묵혀 두어도
그늘같이 썩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십일 층짜리 건물을 짓는 사람이 있다.
그가 말하길, 넢이와 층층엔
백 개도 넘는 물음표들이 촘촘히 박힌다고 한다
갈수록 거푸집은 얇아지고
방음벽은 견고해지며
질문보다는 대답이 항상 값이 비싸다고 한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존재는 인간뿐,
염소나 사슴은 머리를 맞대는 순간 각축이다.
물음표를 편 길이와
느낌표를 구부린 길이는 같다.
이 두가지의 부호 중에
어느 것이 더 보관하기에 좋을까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금고나 통장에
단 하나의 느낌표와
셀 수 없는 물음표를 섞어 잠가 놓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잠가 놓는 방식이다. (-97-)
농부가 쓴 시집 『식물성 피 』이다.시인 이주승은 전북 임실에 태어나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입문하였다.시 『식물성 피 』에서는 자연의 이치를 농부의 시선으로 오롯히 담아내고 있었다. 생태와 순환이라는 자연의 가치는 우리가 경제보다, 시장보다 우선해야 하는 무형의 가치였다. 시인이 이 시에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이 지구의 멸종과 생태는 오롯이 인간의 몫이라는 것읅 말하고 있으며, 풀벌레와 별빛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을 인간의 삶과 자연의 삶 속에서 감지하게 된다.
인간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은 다르다. 인간 사회에서는 허용되지 않은 행동들이 자연에서는 허용된다. 생존을 위해서, 먹이를 찾아다니는 멧돼지는 인간이나 농민에게나 아주 민폐다.하지만 자연의 삶 속에서 멧돼지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꽃과 풀은 , 멧돼지의 온몸에 자신의 종족 번식을 위한 씨앗과 종자들을 덕지덕지 묻혀주길 바란다. 멧돼지의 몸은 씨앗창고였다.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멧돼지가 좋아하는 향과, 멧돼지가 향하는 시선들,자연의 진화는 멧돼지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인가능 삶 속에서 강자가 자연 속에서 강자로 우뚝 서있는 멧돼지의 늠름함이 자연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인간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변화의 중심에 언제나 물음표가 놓여진다. 그 물음표들이 서로 모여서, 어던 위대한 느낌표가 탄생될 때,사회는 바뀌고, 세상은 달라진다. 문제는 그 물음 표가 인간의 삷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 생존 뿐만 아니라,자기 파멸도 인간에 의해서 ,생겨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수많은 물음표에서 ,그 물음표가 어떤 느낌표로 바뀌느냐에 따라서,우리의 삶의 나침반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머리를 맞댄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겠다는 의도, 서열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함이다. 사슴과 염소는 자신의 머리뼈를 이용하여, 서로의 힘을 과시하곤 한다. 인간은 생각을 위해서 ,머리를맞대는 존재이다. 생각이 모으기,물음표가 모여서, 어떤 느낌표를 만들기 위함이다. 공교롭게도 인간 또한 다른 용도로 머리를 맞댈 때가 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머리로 상대방을 들이박을 때이다. 공격적인 행동, 분을 이겨내지 못할 때 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단죄를 묻는 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행동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써야 하는 레슬링이나 씨름과 같은 스포츠에서, 머리를 맞대어서, 서로의 힘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예외다. 같은 장면,같은 상황을 농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새롭게 느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