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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의자 ㅣ 걷는사람 시인선 69
정정화 지음 / 걷는사람 / 2022년 9월
평점 :
이제는 없는 나날을 세다
얼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꽃무늬 벽지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식탁 아래에서는 아이들 발바닥이 날마다 넓어졌다.
팔월의 달력은 해변의 모래사장과 개들의 산책으로 시작하고
우체국을 지나면 독일제빵 또 지나면 딱따구리문구
내 서랍장은 문구점을 열었다 닫았다
색색의 볼펜과 메모지, 일기장은 가득했지만
어떤 문장도 쓸 수 없었다.
밤늦게 돌아온 부은 신바들이 현관 앞에 두 발 오므리고 있을 때도
수도꼭지에서 똑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이마에 부딪혀도
수건을 개고
글씨를 예쁘게 쓰면 함박눈이 내릴지 모른다고
그렇지만 일기장은 온통 거짓말로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을 뿐
허겁지겁 먹는 식습관만큼 오래된
손톱을 물어뜯는 일
한여름에도 내복을 입고 양말을 신고 잠드는 닝
식탁에서 시작되는 매일은 넝쿨 식물이 된다
서로의 지느러미를 뜯어 숟가락 위에 올려주고
메마른 손톱을 만져 주는 동안에도
날은 어두워져 변기에서는 물이 계속 샌다.
빨간 세숫대야에 솜뭉치 기저귀를 종일 주물럭거리던 그녀
화장품을 하수구에 버린 그녀가
이제는 없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아픈 것들을 둥글게 둥글게 깎는 마음의 테두리들.
버리지 못한 꽃무늬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뜨거운 야채 수프를 먹고 싶어 방문을 연다.
방한 가운데서 자라나는 당신의 나뭇가지에는
아이스크림 냄새가 퍼진다. (-13-)
통영
바다 앞에서 버스르 기다렸습니다.
벤치 위에 해변과 파도를 오려놓고
가을 태풍을 이야기합니다.
아무 목적 없이 이곳에 도착했지만
미술관 창문에선 옆집 옥상이 보였고
여름 부추가 피어 있었지요
연하게 물들었습니다.
새끼손가락에 매달린 심장은 작은 것들이었고요
카페라테에 잎사귀를 그려 넣었어요
거품이라는 걸 알지만
푸른 잎들은 몇 겹 덧대어진 오후마저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머그컵이 식기 전 테이블은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손님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노란 우산을 펼치고
동무의 발을 그립니다.
너무 바쁜 발들은 쉬게 해주고 싶었다고요.
염소의 발등에도 동백 꽃잎을 그려 주고 싶었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당시의 신발주머니는 무슨 색이었나요
가끔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
손도 대지 않은 물감들 불룩한 배를 꾹 눌러 버리고 싶다던 말들은
밤마다 천을 오려 덧붙이며 옷을 만들었지만 난 새옷을 입지 않아요.
이제 비가 그쳤습니다. 서로 다른 버스를 타야 합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람이 할퀴고 간 바다의 해안선은 불분명했지만
야자 잎으로 만든 그릇을 당신 가방에
넣어 두었습니다.
오늘 밤 난 음악회에 갑니다.
아주 먼 곳이 되어 돌아올 생각입니다. (-51-)
한 문장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 위로 새끼손가락 문신이 내게 닿았다
아프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십 층 발코니에 천일홍 꽃씨를 심은 적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한 문장에 마음이 접히어
몽골로 떠난 사람을 앒고 있다.
냉동고에는 작년 겨울에 아이가 만든 눈사람이 그대로 뭉쳐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먼 문장은 비밀스럽게 싼 마른 종이로 펼쳐졌다.
아프다는 말을 아프지 말라고 쓰고 있었다. (-93-)
시인 정정화는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1994년 『시와반시』 1회 수상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삶의 굴레 속에 갇혀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 덧 30년간의 시적 굴레 속에살아온 지난 날,시인이 추구하였던 시에 대해서,삶의 원칙과 자신이 담아내고 싶었던 인생이라는 하나의 시적 그림을 이해하고자 한다.그리고 시인 정정화는 화가의 삶을 살아간다,
시라고 부르고 수채화라고 말한다. 시에는 사실적인 묘사와 은유로 채워진다.이러한 시를 산문시라고 말한다. 시화집으로 내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두 페이지에 걸쳐서 쓰여진 시, 그 시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그대로 녹여 내리고 있었다. 보고,듣고, 느끼고,이해한 것들 속에서, 때로는 나의 과거속 경험들이 세월을 비껴가면서, 추억으로 남아있다. 시인은 자신의 삶과 느낌을 시에 해석적 기법으로 녹이고 있었다. 삶이란 결국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아픔을 피할 순 없으니,그 아픔을 견딜 수 있느 베짱이 있어야 한다고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위로와 치유는 한 몸이었다.
한편 그녀의 시 ,오십에 쓰여진 『알바니아 의자』 는 난해하였다. 시집에 수록된 마흔 여덟 편의 시 에서, 시 『알바니아 의자 』 를 제목으로 들이밀었던 이유가 긍금하다. 시인을 만나면, 물어 보고 싶어진다.시에 녹여 내고 잇었던 양의 울음소리는 무엇이며, 알바니아 의자에서 바라다 본 시인의 상상과 은유, 목가적인 느낌들이 자연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시인는 알바니아 의자에 앉아 어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응시된 관찰이 시적 사유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