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 농민의 역사
주강현 지음 / 들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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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도작문화란 한국문화의 원형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떡을 찔때 , 순백의 백설기를 중시하는 것은 쌀로 빚은 최초의 순수한 결정을 신에게 바치는 풍습에서 말미암았다. 지금도 풍물소리는 한민족 가무의 으뜸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소리에는 농민들의 희로애락했던 역사가 배어 있다. (-31-)

두레는 바로 이 김매기를 위하여 조직된 공동체이다. 한해 농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유풍으로 두레가 적극 조직되고 확산되어 한국 사상 유래 없는 독특한 두레공동체문화를 생성했다. (-42-)

넷째.힘든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두레를 조직했다.

1943년에 충남 아산의 두레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임금을 지불하고 농업노동력을 조달할 수 없었던 한말에 논매기를 위한 노동력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하여 논매기작업을 공동노동의 방법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한 공동노동이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군율에 버금가는 엄격한 규칙과 계급조직이 요구되었다고 했다. (-165-)

두레꾼들이

두레풍물 치며

두레두레 모여

두레농사 짓네.

두레꾼들이

두레타빼기 마시며

두레두레 모여

두레지심 매네

두레꾼들이

두레타작하여

두레샘물로

두레밥 지어

두렛상에 앉아

두루두루 먹네. (-289-)

아시 매기 : 모내기 끝내고 약 15일 후에 뭂을 빼서 약간 자작자작하게 해놓은 상태에서 '아기더듬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손으로 풀을 뜯어나갔다. 세세하게 벼 포기 사이를 매나가는 방식이었다.

두벌 매기 : 이듬은 아시 매고서 1주일 뒤에 호미로 맸다. 호미로 잡초가 있는 흙덩어리를 파 엎어 찍어나가는 방식이었다.

세벌 매기 : 이듬 후에 1주일 지나서 두벌매기와 동일하게 맸다. 두 벌에 웅덩이진 곳을 다른 흙덩이로 메우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흙을 흐트러뜨리기 위하여 두벌보다는 물이 더 많아야 했다.

민물 매기 : 세벌 후에 일주일 지나서 손으로 더듬어 훔쳤다. 완전히 물을 빼고서 손으로 더듬어 잡풀을 흙 속에 집어넣었다. (-368-)

첫째. 장은 농민이 좀더 큰 사회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공간이다.'장날 만나세' 라는 말과 같이 일상적'약속의 장소' 이다. 장은 향촌 사회의 여론이 형성되고 집산되어 확산되는 시발점이 된다. 각 자연마을의 대소사는 장을 통하여 전파되어 나간다. 즉, 장은 모든 여론이 조정, 전파되는 정보전달의 구심점이 된다.

둘째, 장은 농민의 공동체적 삶이 촌락을 벗어나 동일 공동생활권으로 확산되는 공간이다. 장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지역사회의 구심점으로서 공동생활권을 결속시키는 사히적 기능을 가진다. 각 지역의 두레꾼들은 합굿 같은 놀이적 요소로만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장을 통하여 만나고, 술도 마시고 삶을 공유하게 된다. 가령 백중에는 백중장이 들어서서 각 지역의 두레꾼들이 무여서 힘자랑을 하면서 씨름 등을 즐기는 풍습이 해방 이후에까지 이어졌다. (-482-)

하얗게 깎아 세운 화간이 하늘을 찌를 듯하니,

시골 농가에서 멀리 풍년을 기원한 것이다.

집집마다 곡식 쌓기를 능히 원하는바와 같이 한다면,

먼 길이 되어서 장차 석름봉 과 같을 것이다.

농사를 짓는 길한 날에 처음 볕이 따뜻하니 장대 머리에서 흰밥주머니를 내린다. 늙은 여종들은 부지저니 물 부리고 쓰는 것을 사양하지 마라.가장 많이 덕을 나누어주어 주린 창자를 배불리 해주마. (-533-)

이들 농민들은 이미 봉건제하의 농민들처럼 단일 공동체의 농민들이 아니라 식민지하에서 문해르 당하면서 착취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던 것이다. 식민지하 민족해방운동의 지평은 이들 농민들의 유동적 변모와 이를 시민계급의 입장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입장으로 묶어세우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레굿이 지녔던 매우 강인한 잠재된 동력을 읽어볼 수 있다. (-647-)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수많은 이들이 징용 징병 등으로 끌려갔다. 두레의 성원들은 모두 노동력이 왕성한 성인남자들이므로 이들의 부재는 두레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하여 여성들까지 김매기에 투입되어 공동작업반이 꾸려지는 실정이었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두레풍물굿을 놀 사람도 없었고,악기마저 공출당해 두레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735-)

미국 아마존에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호미가 팔리고 있다.미국에는 없는 농기구 호미는 한국 고유의 문화인 두레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농기구다. 밭노사보다 논농사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노동집약적인 논농사의 특성상 두레가 없었다면, 농사를 짓기 힘든 사회가 조선후기 우리의 실정이다.두래는 농사기술이 변변치 않았던 상황에서, 농촌 사회의 생존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두레는 한국 특유의 농업문화의 토대가 되었고, 변변한 농사기술이 없엇던 과거에 두레 문화가 유일한 생존 수단이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졌으며, 호미질을 통해,논에서 김을 매기 시작하는데,이러한 상황이 우리 특유의 고유 두레 문화를 정착시키게 된다. 여기서 두레 문화가 풍물 문화와 엮이게 되며, 해마다 우물 고사를 지냈던 이유가 주강현의 『두레』에 자세히 기술되고 있으며, 시골 뿐만 아니라,도시에 5일장 장터 문화도 두레 문화의 확장이다.

두레 문화는 일제시대 일본에 두레 공동체 내의 청년들을 전쟁에 투입시키면서, 두레가 사라지게 된다. 두레조직,두레공동체 내부의 규율과 규칙준수를 할 수 있는 주체가 사라지게된다. 두레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총각농삿꾼이 줄어들게 됨으로서, 두레 문화는 그 흔적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 삶 곳곳에 고단한 일상을 덜어내고자 하는 흥이 있고, 풍물을 통해서, 농사의 고단함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삶의 방식, 농촌에서,도시 공동체에서, 두레 공동체 내부에 누군가 사망하게 되면, 내일처럼 팔을 걷어 붙이고 함께 일을 해왔던 것도 이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대한민국이 모래처럼 각자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다가도, 국가의 위기가 나타날 때, 똘똘 뭉처서 함께 해 왔던 이유는 우리의 민족의 정서 안에 두레의 혼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처럼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 논 모내기,논 김매기는 기계에 의해 자동화되고 있다.하지만 민족 정서 곳곳에 숨어 있는 두레 문화로 인해,우리는 내것을 타인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 함께 어려운 일을 방생할 때에, 해결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두레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에게 경조사가 발생할 때, 함께 하려는 한국인의 심리가 지금까지 명맥틀 이어오고 있는 이유도 이 책을 읽어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저자의 박사 논문 기초자료에 해당되는 저서 , 주강현의 『두레 』 를 통해 한국의 농촌사회의 특징과 고유의 배타성 과 내부의 끈끈한 정서와 외부의 이질성을 함께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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