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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쓰는 시간
임은자 지음 / 프로방스 / 2022년 9월
평점 :
빡빡머리 다섯 살 꼬맹이를 만나는 날은,다른 아이를 바라보듯 웃음이 났다. 5학년 운동회 날에는 억울했던 엄마의 응원이 들어있다. 짤랑거리던 아빠의 주머니를 쏙쏙 뻬먹던 날엔 어린 것의 당돌함과 아이의 노파심이 들었고, 외양간 모깃불 사건은 엄마의 불타는 사랑을 보여준다. (-11-)
엄마는 사위를 대장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의 대장이란 뜻이다. 그러나 25년 전엔 대장은 커녕, 지나다가 만나는 청년쯤 되는,그보다 못한 그저 흔한 '자네'였다. 행여나 우리 가족이 될까 자네보다 더한 표현을 알았다면 엄마는 분명히 그 호칭을 썼을 테다. (-43-)
딸의 쓸모.
신은, 아들 많은 이 집안에 나를 보내ㅈ며너 사명 하나를 주셨다. 아들들이 해야 하는 묵직한 책임과 의무 대신, 재롱을 떨고 침대에 누워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는 작지만 큰 역할을 주셨다. 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딸 낳기를 간절히 원하시던 아빠의 바람에 걸맞는 쓰임새다. (-67-)
형재와 사촌의 구분 없는 대가족이었다. 25명 중에 맨 마지막으로 내가 태어났다. 터울이 많아 내가 기억하는 일들은 별로 없지만, 언니 오빠들에겐 수 없는 이야기보따리가 있을 테다. 제일 큰 사촌 오빠와 내 나이가 정확히 25년 차이가 난다. 평균 한 해에 한 명이 태어난 꼴이다. 감성적이고 인문학적인 어른들이 어쩜 이렇게 과학적이었는지 놀랍다. (-75-)
나는 임시정부의 리더이자 25명 중 막내다. 아짜가 그랬던 것처럼, 백범 김구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나 놔두고 먼저 다 가버릴 날들이 걱정이다. 모두 다 가고 나홀로 남을 날을 상상하면 서글퍼진다. 그 허전함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78-)
아빠의 바람은 소박해서 도서관에 가서 『조선왕조실록』 다 읽어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97-)
굶주린 도둑고양이들 뻔히 보면서 매번 음식을 숨겨야 했을 엄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세상에 어느 부모가 굶기고 싶겠냐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홍을 이해한다. 실컷 먹고 싶은 게 자식들 바람이었듯, 실컷 먹이고 싶은 게 부모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127-)
언니는 엄마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이 사람이 우리 엄마라고 했는데, 우리 엄마가 아니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머리도 피범벅이다. 신발도 없다. 커다란 손과 발이 우리 엄마랑 닮은 것 같다. (-178-)
1974년 7월 5일 생, 지금으로 보면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식이 많은 집안에서, 다섯 남매 중, 4남 1녀 중 막내 따로 태어난 저자 임은자 님은 경남 산청군 생초면 구평초등학교 에 다녔으며, 혀에 사촌 구분짓지 않았던 그 시절에 친인척 25명의 언니, 오빠, 동생들 사이에서, 제밀 마지막 막둥이로 태어나기도 했다. 즉 시골에 흔하던, 집성촌의 일상적인 모습이며, 첫째와 막내 임은자님의 나이터울은 부모의 나이와 비슷한 25세가 된다. 평균 1년마다 태어났던 그 삶 속에서, 뒤주에서, 몰래 몰래 야금야금 먹었던 군것질 꺼리들, 때로는 아기자한 삶,부묌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재롱을 떨면서,지내온 삶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임씨집안, 임시정부 의 리더 임은자님의 삶의 편린들이 곳곳에 스며들곤 한다.
행복은 별거 아니었다. 기쁨 또한 별거 아니었다. 서로 위로 해주고, 따스한 정을 나누면서, 슬픔과 아픔을 느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의 만족도를 올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내 앞에 주어진 삶을 나답게 살아가며, 불평을 덜어내면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스스로 만드는 것에 있다. 함께 살아가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한 집안에 막내이면서, 임씨집안, <임시정부>의 리더 여할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의 삶 속에 숨어있는 따스한 공감과 위로,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내 앞에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한 권의 책 『인생을 쓰는 시간 』 에서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