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지 - 푸른 눈의 청소부
최문정 지음 / 창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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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고환을 잡아당기자 몸과 연결된 부위의 주름이 펴지며 길게 늘어났다. 황산이 든 주사기의 바늘을 잘 조준한 뒤 피스톤을 눌렀다. 조금씩, 촘촘히 ,거무튀튀한 피부가 하얀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고환 주위의 음모를 타고 황산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살집이 있는 가랑이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살이 타는 냄새와 뿌연 연기가 방안을 가득 ㅊ웠다. 마침내 고환과 몸이 연결된 부위가 지글지글 녹아서 눌어붙었다.

외과수술용 가위를 끝부분에 살짝 갖다 대고 조심스레 가위질했다. 도려낸 부분은 완전히 익어 피 한방울 나지 않았다. (-15-)

"내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강팀장이 알려줍디다. 안곡서는 자진해서 한인걸 사건을 맡겠다고 나선 형사도 있다면서 우리가 먼저 범인 잡아야 한다고 어찌나 닦달을 하던지. 우리 강력팀장이 거기 강력팀장직속 후배인데 좀 맺힌게 많더라구요. 자기 자존심 상하게 만들면 가만 안두겠다고 매일 수사 진행상황을 물어봐요. 안도현 사건에 대해 물어보러 오신 거 맞죠?" (-100-)

"복수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복수보다는 나를 죽이는 일이 더 간절했으니까요.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신은 기어이 나를 살려냈어요. 몇 번이나 .정말 죽고 싶었어요. 죽고 싶은데 죽을 수 없어 절망했어요. 죽음이 단 하나의 소망이었어요. 하지만 신은 나에게 안식을 허락지 않았어요. 이제는 그 희망조차 버렸어요. 그저 나를 가득 채운 절망에 익숙해져야겠죠."

효리는 가죽끈을 꼬아서 만든 샌들을 신고 있었다. 부러졌던 왼쪽 발목의 흉터는 흘낏 보고 지나칠 수 있었지만 오른쪽발목에서 뒤꿈치까지 남아 있는 흉터는 눈에 확 띄었다. 목을 매달고 자살을 시도하다 줄이 끊기는 경우 가장 많이 다치는 곳에 발뒤꿈치와 말목이다. (-207-)

혜미는 한인걸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는데요?"

"아직도 부정적인 감정이 남아서 그래요. 하지만 심리검사 결과 공포, 증오, 원망, 경멸 드의 부정적 수치는 평범한 사람이 한인걸에게 가지는 부정적 감정수치와 비슷해요. 한인걸을 용서한 거죠. 모두 잊었다고 하죠? 용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쨌든 의학적 연구와 실험 데이터로 볼 때 효리나 혜미가 복수를 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해요."(-243-)

나는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황홀하게 죽는 법,찰나의 순간에 죽는 법, 천천히 죽는 법, 깔끔하게 죽는 법....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조건은 꽤 까다로웠다. 나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감히 내 자살 이유를 오해할 가능성은 차단해야 했다. 무가치한 감정 따위로 나의 이성적 판단이 모욕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325-)

소설가 최문정의 『사랑 ,역사가 되다』 를 2021년 2월에 읽은 바 있다. 그 소설은 세기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소설, 역사소설에 가까웠다. 그 책보다 더 유명한 『바보 엄마 』 는 추후 읽을 생각이다. 이번에 나온 소설 『어벤지 』는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다.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범죄,그 가해자에게 가하는 복수 . 눈에는 눈,이에는 이, 함무라비법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작가 최문정은 깊이 파고 들어가면서,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 심리와 태도를 엮어 나간다.

어떤 잔인한 사건 사고가 뉴스에 올라오거나 ,SNS 에 올라올 때면, 거의 실시간 반응이 뜰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가해자를 얼굴을 공개하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의 뜨거운 요구가 강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로 대표되는 여성과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특히 그렇다. 대중들의 눈높이를 언론이나 법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 경멸하고, 분노하고 절망한다. 소설 『어벤지』 에 등장하는 주인공 한인걸이 바로 그러하다.

한인걸은 파렴치한 범죄자이다.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린 여아를 성폭행하고, 평생 기저귀를 차야 할 정도의 잔인함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한 한인걸의 죗값은 단순히 교도소에 12년 살다 나오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는 가해자이지만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 발찌를 차는 것으로는 미흡하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한인걸을 상대로, 물리적 거세를 하고 말았다. 가해자를 상대로 한 정당한(?) 범죄, 누군가 대신해주길 바라는 그 범죄, 그 범죄에 대해서, 그 누구도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위 정의롭다 말하는 검사나 변호사조차도, 그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뀔 때,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 말하지 않는, 사필귀정으로 보고 있다. 그과정에서, 한인걸을 상대로 한 범죄자와 증거를 물색하는 과정애서 여러가지 정황들이 나오고 있으며,피해자를 상대로, 한인걸을 거세한 범죄자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소설 전체의 흐름을 잡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 악마, 루시퍼 , 사탄이 아오는 이유, 니체 사상이 등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떤 범죄에 대해,그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순간, 선악으로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를 복수할 것인가, 그를 복수하지 않을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로 구분지을 뿐이다. 누군가의 어떠한 말도, 피해자를 설득시킬 수 없고, 납득시킬 수 없다.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것은 피해자 스스로 절망의 늪으로 늪으로 빠져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고 싶은 심정,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로서, 종결짓고 싶은 인간의 냉혹한 본성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며,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설은 바로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그 누가 가해자를 상대로 한 가해를 잘못했다고 말할 것인가., 법으로는 잘못된 일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잘못이 아닌 , 옳은 일이 될 수 있다. 작가 최문정은 여성을 상대로 한 어떤 범죄에 대해서, 법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와, 도덕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어떤 차이가 나타나는지 말하고자 하였다. 가해자는 교도소에 나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피해자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자기 스스로 파괴한다. 죄를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라는 그 말이 피해자에겐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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