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농 林農
이용호 지음 / 삼사재 / 2022년 8월
평점 :
이 허련 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화업을 있는 넷째아들 미산 허형과 또 그의 넷째아들이 그 유명한 남농 허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방계인 의재 허백련까지 그야말로 호남 남화의 큰 어른이시지요. 소치 허련이 말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거주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 운림산방입니다. 첨찰산 서쪽 , 쌍계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데 훗날 그의 손자인 남농이 전 재산을 털어서 아주 잘 건립해 놨습니다.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입니다. (-27-)
달리 편지는 없었다. 철경은 구멍가게부터 가서 외상값을 갚았다.
철경은 그렇게 원광고등학교 2학년 2학기의 중반을 보내고 있었다. (-82-)
남농은 추운 겨울에 방이 좁아서 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왼쪽 발이 동상이 걸렸었다. 그것이 도져서 결국에는 왼발과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남농이었다. 그래서 남농은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제는 먹고 살만하기에 배우려고 오는 제자들에게 교육비나 받을 그런 남농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거쳐 간 도촌 신영복이며 아산 조방원이며 전정 박항환이나 그 외에 다른 여러 제자들이 국전에서 내리 특선을 하고 국전의 심사이원을 역임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남농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교육비를 따로 낸다거나 교육비을 걱정했건 사람은 없었다. (-185-)
임농은 1982년 서른 한 살. 늦은 나이에 목포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신입생들보다 열 한 살이나 많은 나이였다. '늦깍이 신입생' 농이 학교 복도를 지나가는데 마주 오던 학생들이 교수인주 알고 "교수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임농은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목례를 했다. (-275-)
조선시대 소치 허련은 추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 삼고초려 하였으며, 그는 남종화풍을 완성하였으며,그의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그리고 방계인 허백련으로 이어지게 된다. 허련은 1808년에 태어나 1893년 사망하였으며, 남농 허건은 1907년에 태어나 1987년 사망이 이르르게 된다.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건, 소설 속 실명으로 등장하는 임농은 남농 허건의 제자 임농 하철경의 생애를 다룰 소설이며, 그가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목포에 머물면서, 남농의 제자가 되기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산수화와 수목을 좋아했던 남농의 수하 제자였던 임농은 고등하교 시절 서양화를 배웠지만, 남농 밑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소설에는 고완당 표구사가 등장하는데, 그의 작품이 알려진 곳은 고완당 표구사에 의해서였다. 단순히 그림을 복원하는 표구사로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그림을 사고 파는 중개자로서, 표구사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름을 떨쳤던 추사 김정희의 또다른 아호이기도 하다. 이 실명 소설은 남농의 삶과 그 남농의 그림을 후대에 되물림하였던 임농의 삶을 고찰하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를 떠나서, 서로 한끼 식사를 나누는 각별한 사이, 피로 맺어진 혈육보다 소중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소설은 가난하였지만, 오로지 평생 그림을 그리는데 매진하였으며, 후학을 기르되, 엄격한 스승의 본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나고 있었으며,나에 대한 여러가지 기준과 가치관, 그림에 대한 애착, 그리고 남농이 남겨 놓은 수석 2000여점이 있는 목포문예역사관 그리고, 그를 기리는 고 남농허건애석비까지 그가 추구하였던 문화적 가치는 서로 소통하고, 삶을 공유하면서 연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