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윤슬이 빛날 때
박소현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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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길은 경상북도 울진에서 봉화를 잇는 130리 고갯길이다.울진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내륙으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다. 보부상들은 미역이나 생선 등 해산물들을 쪽지게에 지고 이 험준한 자드락길을 걸어서 봉화 춘양장과 내성장 등으로 팔러 다녔다. 3,4일을 꼬박 걸어야 겨우 봉화장에 도착했다. 내장까지 얼려놓을 듯 사정없는 추위에도 등에는 진땀이 흐르는 혹독한 고통을 견디며 굽이굽이 이 열두 고개를 넘었다. (-15-)

"니 결혼식 날 보고 처음이구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간신히 눈을 뜬 외숙모가 내 손을 쓰다듬었다. 물기라곤 없는 까칠한 손이었다. 30여 년만이었다. 얼굴이 참 고왔던 40대 외숙모는 70 중방의 병든 노인이 되어 나와 마주했다. (-59-)

영화 <벤허>에서 유다 벤허의 멘토로 나오는 모건 프리먼은 자꾸 과거를 되돌아보는 유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돌아보지마. 유다, 삶은 앞에 있어" 라고. (-112-)

1979년 10월, 부산 남포동 밤거리;.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몰려 나와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날, 경찰이 쏜 최루탄으로 아수라장이 된 그 거리에서 엉거주춤 시위대 틈에 끼어 있던 스무 살 앳된 내 모습이 보인다. 숨도 쉴 수 없었던 최루가스를 피해 엎어지고 자빠지기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 아스팔트는 왜 그렇게 미끌거리던지. (-128-)

"남한테 공 것 바라지 말고, 항상 내가 손해 본 듯 살면 탈 없는 기라!"

수구초심이라 했던가. 연어가 회귀하듯 ,어머니는 고향 이야기를 하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당신이 불공을 드리러 다녔던 남해 보리암을, 정월 대보름날 밤, 바가지에 촛불을 켜서 쌀과 동전을 넣어 바다 저 멀리로 띄워 보내며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했던 마을 앞 선창가를....(-181-)

허영선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제주 4.3 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제주를 알고 시인의 더 깊은 속살을 알려면 『탐라에 매혹된 세계인의 제주 오디세이 』 를 보아야 한다. 이 책은 허 시인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여 동안 제주를 방문했던 세계 유명인들을 인터뷰해 <제민일보> 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읻자. (-236-)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 때,우리 앞에 놓여진 지난날의 과러를 들여다 보곤 한다. 삶에 대한 회피, 삶의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면, 자신의 삶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동시에 놓고 살아가곤 한다. 추운 겨울이면, '구들장을 태우는 군불'이 그리워지고, 더운 며름이면, 내 몸을 적시는 차가운 냉체 한 그릇 먹고 싶은 생각이 스스로 감돌게 된다.

저자의 삶에서 , 얻고자 하는 지혜란 경험 속에 녹여져 있었다. 1979년 스무살, 최루탄을 맏으면서, 삶과 죽음을 마주하였던 그 순간의 기억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자신의 것이 되곤 한다. 삶의 고단함과 피곤함 마저도 욕심으로 생각하였던 그 시절, 생존에 갈급하였던 앳된 스물, 그 시절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책에는 울진과 봉화를 잇는 꼬불꼬불한 길을 말하고 있다.지금은 두 지역을 자동차 도로가 생겨났지만, 10년 전만 하여도, 여전히 고불고불한 길이 놓여져 있었다. 멀미는 기본이며, 현기증 나는 그 도로 언저리에는 보부상이 지나간 과거의 궁핍한 삶이 기록된다. 언제든 밥상 위에 미역을 올리며 먹을 수 있었던 현대인의 삶에 대해서, 50년전 과거, 울진에서 보부상의 손에서 넘어온 매역과 해물의 가치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닌,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날에 올리는 귀한 음식이다. 춘양장, 봉화 내성장, 그곳에 바글 바글 거렸던 과거의 정취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 삶을 기록하고, 몸으로 느껴왔던 이들이 하나둘 하나둘 생을 마감하고 있어서다. 저자의 기억은 현재가 아닌 과거로 향한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삶은 그렇게 우리 삶을 스처 지나가곤 한다.

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었다. 저자가 생각하였던 일흔 중반의 외숙모 이야기가 나오곤 하나. 이 구절에는 나의 삶이 있었다. 2014년 세상을 갑자기 떠난 시골 외숙모는 예순을 이제 갓 넘긴 삶이었다. 폐렴에 온몸이 고통스러운 가운데, 자신의 삶의 마지막 발자국을 제2의 고향에 남기고 싶었다. 타향살이를 전전하면서 살아온 그 삶 언저리에 숨겨진 힘겨움은, 나의 숨과 명을 스스로 내려놓음과 동시에 연은 끊어지곤 한다. 차가운 손과 손가락 마디 마디에 서려있는 늙어감에 대한 몸의 기억은 누군가에겐 반드시 살아가야 하는 깊은 이유, 삶을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를 명징하게 말하고 있다. 삶이 보여주는 지혜는 그 어떤 지혜보다 강한 자국을 남기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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