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을 사랑하기로 했다 - 사랑, 그 난해한 문제를 풀기 위한 가장 인간적인 방법
이상란 지음 / 치읓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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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나는 빛나는 아이였다. 한 여대생이 서너명의 청년들 사이에서 희롱당하고 있을 때, 그때는 적어도 용기 하나는 가지고 있었다.

"여자 분이 싫다고 하잖아요! 남자들이 비겁하게 무슨 짓이에요?"

겁 없이 달려들어 여대생을 빼내고 당당하게 호통 치던 아이였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공원 한구석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학생을 향해 나서지 못한다. (-9-)

초원 위에서 알몸이 되었다. 강물 소리와 바람과 하늘의 별, 그리고 별빛에 빛나던 키 작은 꽃들 속으로 온전하게 들어가는 순간, 나는 옷을 벗고 있었다. 초원은 아무 말 없이 어떤 수치심도 주지 않고 나를 빨간 몸뚱이로 만들어 버렸다. 옷을 벗어 던지자 남편도 나와 같은 알몸이 되어 옆에 서 있었다. 그도 두꺼운 옷을 껴입고 답답한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도 나의 턱을 넘지 못하고 내 언저리에서 혼자 외로워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알았다. 옷은 숨어서 벗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벌판에서 그대로의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추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이든 별이든 꽃이든 무엇인가가 나를 감싸고 있을 테니 말이다. (-54-)

죽음은 나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늘 가까이에 있다. 며칠 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그리고 지난밤에도 죽음에 대해 생각했었다. 쿄통사고가 나서 "나 죽는다." 라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면? 만약 내가 지금 돌연사한다면? 나는 무엇이 안타깝고 무엇이 아쉬울까? 하는 질문을 가끔 하게 된다. 무엇도 내가 세상에 미련을 갖도록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지금 속옷은 깨끗하게 입고 있나?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을 팬티와 브래지어를 같은 색깔로 맞춰 입는 일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나의 시신에서 옷을 벗기는 사람이 누더기 같은 옷 속에서 하얗게 색깔 맞춤된 속옷을 보게 될 때, 나의 삶을 다르게 상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 준비해야 할 유일한 한 가지이다. (-103-)

이런 사랑의 미묘함이 싫다. 사랑에는 정의가 없다. 기준도 없다.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의 합일점에서만 그 가치가 만들어진다. 엄마의 삶을 돌아보면 남매 자식들은 엄마에게 무한한 사랑과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엄마의 노후를 극진하게 모셔야 한다. 어느 부모와 비교해도 엄마는 대단한 삶을 사신 분이다. (-145-)

식물은 스스로 싹을 틔우고 광합성을 하며, 시들어가는 과정을 혼자 겪는다. 개체의 생명주기에 있어 자연과 대응하는 방식이 독립적이다. 동물의 경우는 태어나서 독립하는 시기까지만 어미의 보살핌과 사랑읋 필요로 한다. 다만 그 과정이 짧고 길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60-)

엊그제 나이를 실감하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비움'이라는것을, 몸으로 생각하게 하는 일, 젊음과 나이듦이 부딪히는 현장에 있었다.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나이 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일상에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주는 감정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쇼윈도 안의 화려한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는 듯, 바로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 아주 먼 거리를 체감하게 한다. (-216-)

한번은 교통사고의 위험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초겨울 가랑비가 살작 내렸다. 지인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차에 시동을 걸 때 지인이 소금을 한 바가지 퍼서 나오더니 바퀴 주변에 뿌려주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의 행동에 웃음으로 응대하며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때에도 마음 한켠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21-)

마음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성 앞에 서면 인간은 저절로 주변에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인간 본연의 흐름이다. 원래 모든 존재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산이나 들의 자연 속에서 저절로 무방비 상태가 되고 방어기제를 풀어 놓으며 공격성을 상실하는 것은, 자연이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237-)

사람들은 배려와 사랑, 자비의 행동에 대해서 감동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나'가 그렇게 살지 못하다고 해서 그것에 감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기와 파괴의 행동에 대하여는 눈쌀을 찌푸린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살고 있을지언정 말이다, (-246-)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식물과 동물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유한한 삶,나약한 삶, 의존적이며, 사랑을 갈구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독립적으로 살아가지 못한 인간의 나약한 속성은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벽을 만들면서,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멀어지게 된다. 인간이 가졌던 순수함이 사라지고, 서서히 사람에 대한 벽을 쌓아가며, 성경 속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신화속 사랑 메시지로 치부하고 있다.

작가 이상란, 자신의 이십대 당돌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오십이 넘은 지금의 용기없음을 스스로 꾸짖고 있었다.무형의, 추상적인 사랑의 보이지 않는 그 속성은 인간의 삶 전체에 관통하고 있었다. 없어서, 아쉬울 게 없었던 이십대는 무모하다. 가진 것이 많아서, 책임질 것이 많은 오십대는 방관자가 되어 ,눈앞에 불의한 현실에 탈피하려고한다. 우리 스스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든, 역사속 주인공으로 살아가든, 사랑은 빠지지 않고 , 안급되어졌다. 연산군의 죽음도 사랑에 있다. 광해군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단 사랑이 어디까지 만영되느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쁨과 행복,가치와 의미로 전환되어지는 사랑에 대해서, 노자 사상의 근간이 되는 무위자연 無爲自然 의 철학에 대해 몽골 초원의 자연 앞에서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망각된 과거를 깨치게 되었다.

알아차림, 깨우친다는 것, 그리고 배움을 실천하는 것, 사랑이란 배려, 자비, 이해와 공감 안에 내제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까칠해 보이는 어떤 객체가, 사랑으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이게 된다. 하나의 꽃을 만남으로서, 새로운 변화의 씨앗을 만들어 나가려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붓다, 예수그리스도, 마호메트,그들의 보편적인 사랑은 추구하는 이상향은 다르지만,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에서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삶에 대해서 , 신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자신이 겪었던 지난날을 바라보게 되면, 신의 해석이 반영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이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대해서, 한 권의 책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삶의 근원적인 성찰과 깨달음, 그 속에 감춰진 속살, 사랑의 형식과 내용을 취함으로서,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반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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