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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없는 편지
이춘해 지음 / 창해 / 2022년 5월
평점 :
경아가 형민의 메일을 접한 것은 정오였다.기다린 적이 없었고, 올만한 상황도 아닌 메일이 도착한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경아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서 가슴 뜯기는 아픔을 느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편히 죽을 자격도 없다며 저주했던 그녀의 반응 같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 그는 비겁하고, 비루하고,잔인하고, 온갖 추악한 것들로 채워져 있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그는 오랫동안 그녀 곁에 있었으나 가족을 크게 배신한 사람으로만 기억되어 있었다. 끄뿐이었다. (-8-)
보름 뒤 경아는 워싱턴으로 갔다. 그녀가 그토록 잊지 못한, 그리움에 절어 있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블로그에 근황을 올렸다. (-53-)
그의 글은 최악의 선택을 하겠다는 각오로 보였다. 경아는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그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던 형민의 동생 영호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일들을 설명하고 부탁했다.
"형님은 지금 치료가 필요해요. 겉으로는 말짱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여자를 만나면서 중독이 된 것 같아요. 도움이 없이는 일어서기 힘들 만큼 심각하니까 도와주세요. 방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169-)
수십 번 망설이다 한 말이었는데 경아는 불결하다는 듯 무참하게 잘라 버렸다. 냉정함의 정도를 떠나 무서울 정도였다. 그가 먼 길을 달려온 것은 경아를 향한 마음이 컸는데 몰라준 게 섭섭했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성인이 된 자식들은 걱정이 덜했지만 경아가 늘 걸렸다. 다른 여자와 살면서도 한국을 떠날 때 경아에게 눈물로 메일을 쓴 것이 마음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아가 생각하는 형민은 여자에 환장한 수컷에 불과했다. (-302-)
참, 아이들에게 따로 메일 보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뿐인 손녀 민지에게도 제 대신 입 맞춰 주시고
내 경아만큼 사랑한다고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몇 줄 안 된 글이었지만 경아의 소설보다 더한 아픔이 녹아있었다.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며 글을 썼을지,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서글펐을지, 가족에게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얼마나 처량했을지, 경아는 알 것 같았다. 돌아오고 싶어서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그의 소망은 외면했지만 절절한 심정은 알 것 같았다. (-385-)
소설 <마침표 없는 편지>는 한 남자의 인생 타락과 실패,그리고 처절한 후회가 담긴 이야기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형민과 형민을 한 때 사랑하였던 경아가 주인공이다. 철저하게 성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였던 형민의 모습은 서서히 인생이 무너지게고 말았다. 가족이라는 목적과 의도가 사랑으로 채워질 수 없음을 알게 해 주는 소설은, 우리 사회의 따가운 아픔과 슬픔의 또다른 검은 그림자이기도하다.
그래서 소설이 함축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용서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닐까 싶었다. 절대로 남편 형민을 용서할 수 없었던 아내 경아의 심경은 자신이 누리던 것을 다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려는 강한 생존 의지에 고스란히 담겨지게 된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형민이 망가지길 바라는, 배신자에 대한 깊은 상흔이 존재하고 있었다. 선을 넘으려는 한 남자와 그 선을 넘어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을 거부하는 한 여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반복이 소설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으며,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쌍팔년도에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소설 곳곳에 채워지고 있었다. 사랑하고 싶었지만, 결코사랑할 수 없는 남자, 그 남자는 조금씩 경아에게 다가려고 하였지만, 진심을 담은 편지가 먹혀들지 않게 된다. 거부하고자 하였던 그 심경 속에 공포와 슬픔과 아픔이 묻어나 있었다. 경아는 한 번 속았으면 속았지, 두 번 속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스스로 만든 계획에 따라서, 움직이는 태엽시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미워하는 상대를 용서하는게 최고의 복수라고 하였건만, 경아의 마음 하나하나 엿본다면, 내가 경아라도, 형민을 용서할 수 없을거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적당하게 살아가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잇으며,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대해서, 꼼꼼히 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