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이어령 유고시집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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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빵

꽃은 먹을 수 없지만

빵을 씹는 것보다는 오래 남는다.

향기로 배부를 수는 없지만

향로의 연기처럼

수직으로 올라가

하늘에 닿는다.

들에 핀 백합은 밤이슬에 시들지만

성모마리아의 순결한 살을 닮은

흰빛의 대낮보다 밝다.

붉은 튤립은 화덕의 방보다

뜨겁게 부풀어

속죄의 피보다 더 짙다.

짐승처럼 허기진 날에도

꽃은 아무 데서나 핀다.

들에도

먹지 못하는 꽃이지만

그 씨가 말씀이 되어 땅에 떨어지면

나는 가장 향기로운 보리처럼

내 허기진 영혼을 채운다. (-15-)

냉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천의 물결로 빛나는 강물이거나

천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수풀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살아서 소리 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일인가

천의 지저귀는 새소리거나

천의 갈래로 쏟아지는 빗소리거나

소리나는 것은 모두 다 즐겁다.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그리고 이슬에 젖은 포도알을 터트리는

여름 아침

살아서 어금니로 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38-)

뜸들이기

뜸을 들인다는 말은 밥을 지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리고 밥을 지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압니다.

밥이 다 되었어도 금세 솥뚜꺼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만 참는 것,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

거기에서 인생의 참된 맛이 우러나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사달라고 조를 때 뜸을 좀 들입시다.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뜸을 들이다가 야단을 칩시다.

3분으 못 참아 30분 동안 지은 밥을

설익게 한 적은 없었는지

밥을 지을 때마다

내 아이 뜸들이기를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107-)

만우절 거짓말

네가 떠나고 보름

오늘은 4월 1일

그게 만우절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구급차에 실려 간다는 말

심폐소생을 받고 있다는 말

그 말 그 말들이

모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쓰는거라

미안해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지금 여러분과 함께

4월의 봄을 맞이하고 있어요

만우절 미안해요.

나의 죽음은 말도 안 되는

만우절의 거짓말이었지요. (-162-)

죽음에는 수사학이 없다

내 일찍이 수사학 공부를 했다.

내 일찍히 수사학 교수가 되어

강의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수사학은 없다.

어떤 조사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어떤 조화에도 수사학은 없다.

회사 이름과 회장 이름은 있어도

수사학은 없다.

반어법도 과장법도 은유도 환유도

죽은 자나 산 자나 입을 다문다.

어떤 꽃도 죽음을 장식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말도 죽음을 수식하는 직유법은 없다.

오직 검은색만이 있고 말은 없다. (-185-)

그는 1934년에 태어나 2022년 2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한국인으로서, 지성인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떠난 그가 남겨 놓은 유고시집이다.그가 쓴 어떤 경제학 서적보다 그가 남겨놓은 시집 한 권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것처럼 ,그가 남겨 놓은 철학적인 언어의 향기가 우리 삶을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바꿔 놓는다.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그 생명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응시하길 바라는 그 마음 언저리에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드러나 있었다.

인간은 삶이 허무할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공허감만 내 앞에 놓여진다.그럴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던 방식으로 삶을 응시하여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삶의 모순과 위선 앞에서, 서서히 어그러지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그 본성을 회복시키는 방법은 어디에 있는지 한 권의 시잡에서 ,그 혜안을 구해 볼 수 있었다.삶에 대해서 탐구하고, 탐색하면서, 나의 삶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 볼 수 있다. 후회를 하지 않을 순 없지만,후히할 일을 덜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 배려와 겸손, 감사함으로 다가가야 하는 이유는 그 삶이 나의 몸과 정신을 살찌울 수 잇기 때문이다. 남응 향한 배려가 도리어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느끼면서 살아갈 때, 욕심을 덜어내고,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후회하는 삶을 덜어낼 수 있다.누군가 무너지는 살을 보여줄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빵과 꽃이리라,눈물 젖은 빵, 눈물 젖은 꽃이 상기하는 것은 우리의 가난한 삶과 시간, 빈곤한 정신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겨놓은 정신이 여전히 우리 살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 나갈 수 있다. 행족한 삶을 멀리서 찾지 않으며, 내 앞에서 찾아내어서, 내 삶 구석구석에 채워 나가는 사람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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