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코트 위에서 - 어느 원로 체육인의 인생 이야기
방열 지음 / 대경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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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다리 아래서 살았던 넝마주이들이 넝마바구니 대신 어깨에 따발총을 ,허리엔 칼을 차고 온동네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의 눈에도 낯익은 넝마주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떼로 몰려다니면서 변호사를 잡아갔고, 당대 재벌이었던 박흥식 씨 일가 사람들도 잡아갔다. (-26-)

 

 

1959년 11월 미국 프로농구선수 출신으로,당대 미국 프로농구 제1의 지도자였던 낫홀맨(Net Hollman) 씨가 내한했다. 한국 농구선수 지도를 위해 조동재 아시아재단 사무총장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97-)

 

 

"선수들로부터 생리주기 연장에 관한 설명을 들어 잘알았지만, 시차가 큰 국가로의 여행으로 인해 생리주기가 2~3일 달라질 수도 있고, 선수들이 모두 혼숙을 한다면 주기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시작하면 하품처럼 옮길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선수들을 위해 약을 처방받고 대회기간에는 한국 선수들 모두가 무생리로 경기에 임하도록 했다. (-177-)

 

 

아시아 농구에서는 1960~1970년대 초까지 한국이 간혹 정상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필리핀이 가장 강팀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1974년부터 중국의 아시아농구연맹 가입과 필리핀의 프로농구 출범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잠자던 대륙이 깨어나기라도 한 듯, 무텐추(235cm) 라는 세계 최장신 선수를 앞세워 손쉽게 아시아 정상권에 돌아섰다. 한국 농구가 필리핀 벽을 넘어서자 새로운 타깃으로 중국이 떠오른 것이다. (-239-)

 

 

1987년 11월 아시나농구선수권대회가 방콕에서 개최되었다.대회의 성격은 아시아 농구의 챔피언십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지만, 한국으로서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가오는 올림픽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연마한 기량을 점검해 보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274-)

 

 

투표 결과 방열 14표, 한 총재 5표, 이 회장 4표, 무효 2표로 나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해 제32대 농구협회 회장으로 당선됐다. 장내에 있던 농구인들이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오늘의 선거 결과는 농구인의 승리"라며 "농구인들의 의견을 모아 협회를 개혁해 나가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342-)

 

 

1955년 경복중학교를 입학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평생 함께한 벗들의 이름을 부러본다.박석찬, 차봉관, 김지환, 조철민, 이정현,민영달, 전정윤, 박효남,황윤덕, 조용무,이희준, 구자영,민승구, 노대영, 김욱, 이정욱,이복원 ,김응태 등이다. 우리는 만나면 이름을 부를 때가 없었다. '야, 찬밥','말대가리','전웨인','호박','깜둥이','침새'등으로 부른다. 우린 아직 학창 시절 이후 나이를 잊은 채 있는 그맘 그대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450-)

 

 

1941년 생 ,농구 선수 이자 농구감독이었던 방열의 삶에서 농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었다. 1950년 인민군에 납북되었던 아버지 방태영,그 당시 방열은 교동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가난하고, 굶주림에서, 넝마주이가 되었던 판자집 일색의 서울에서, 아버지 방태영은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삶은 저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1955년 경복 중학교에 입학하였던 방열은 한국에 내한하였던 미국의 유명한 감독을 보았으며, 농구를 하면, 자신의 삶의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6.25 전쟁 이후,하루 하루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였던 대한민국, 스포츠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이 아시아 최고의 농구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농구 선수 방열의 역할과 영향력이 있었으며, 선수로서의 역량과 선진국과 경기를 치루면서,체득한 경험들이 후대에 긍정적인 되물림이 되었으며,대한민국에 프로 농구가 탄생될 수 있었던 초석을 만들어 주고 있다.한 때 대학농구의 전성시대가 있었으며,드라마 마지박 승부가 인기를 이끌었던 그 시대에, 아시아의 맹주로서, 대한민국 농구의 중흥기를 만들수 있었던 건,그가 보여준 농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이후, 1986년 강팀 기아 남자 농구단을 이끌었던 방열은 제32대 농구협회회장이 되어, 대한민국 농구인의 사회적 역할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자신이 보여준 농구인의 자세는 스포츠 외교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치고, 필리핀을 넘어서서, 중국과 맞대결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보여준 서울올림픽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방열 감독의 한국의 남자 농구의 역량을 키워 나가게 된다. 그리고 70 년 가까운 농구의 살아잇느 역사이기도 하다. 하나의 모교와 농구로 다져진 인생, 방열의 삶이 한국인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보여준 시간과 노력, 땀의 결실이 현재의 프로 농구의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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