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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의 일상과 기억 ㅣ 독립기념관 학술연구총서 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엮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12월
평점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이후부터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폭격기의 '무차별 공습(無差別 空襲) 에 노출되어 있었다. 무려 8년여에 이르는 임시정부의 이동시기는 일본군의 공습에 따른 피난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충칭에 정착한 이후에도 그 피해는 끊이지 않았다. 충칭 임시정부 당시 청사를 세 차례나 이전해야 했던 주요한 이유도 일본군의 공습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본군 비행기의 기총소사와 공중 폭격이 쏟아지는 죽음의 전장을 맨몸으로 이겨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던 것익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면면에는 이러한 공습에 따른 곡절과 피해 실태가 함께 점철되어 있다. (-32-)
조선민족혁명단 부주석 김원봉은 중국 각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난징으로 불러 모아 83명의 민족혁명당 청년들을 장시성 싱쯔현(星子縣) 소재 중국 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시켜 훈련을 받게 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분자임을 인정하였지만 병력이 될 만한 여서이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사관훈련을 받았다고 알려진 사례는 이 무력 전무하였다. (-94-)
한국광복단은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되어 1946년 5월 16일에 복원선언으로 공식 해산될 대까지 6년여의 존속기간 동안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군복을 착용했다. 창설초기에는 중국 국민정보의 조례에 따른 군복을 착용하였고, 1945년 2월에 이르러 <육군제복도안> 과 <육군휘장도안>을 반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군복을 제정하였으며,미군과 군사 합작을 하면서부터는 미군 순복도 착용하게 되었다. (-160-)
미군정은 1946년 1월 21일 법령 제28호를 발표해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을 명령햇다. 이 법령은 광복군의 존립과 집단적 귀국에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오광선이 이끌던 광복군 국내지대로 미군정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3월 2일 해산했다.상황을 주시하던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1946년 5월 16일 중국에서 '광복군 복원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은 광복군의 해산과 다름이 없었다. (-229-)
후밍수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일본에 한국인 학생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것으로 보이는데 1937년 그는 자신이 거처 근처에 거주하던 '조선'부녀자들을 강인함에 감동하여 『조선 아낙(朝鮮婦) (1936)』 이라는 시가를 창작하였다. 후밍수는 바로 이전 '아리따운 모습을 한 한국인 소녀 혁명가 형상'을 넘어선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한국인과 하일 투쟁을 뒤에서 마치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한국인 부녀자의 형상을 창조하였다. (-290-)
상해임시정부의 수장 김구는 1876년에 태어나 1949년 서북청년단 일원이었던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절, 대한민국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였으며, 만주 일대를 떠돌아 다니면서, 죽음을 불사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역사를 만들었다.그 역사 속에 한국광복단의 활약이 있었으며, 이 책은 단순히 독립유공자의 일원으로 종속된 한국광복단이 아닌, 독립운동을 주체적으로 이끌었던 임시정부 뒤에서 활약한 한국광복단의 현주소를 들여다 보고 있다.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되어 1946년 5월 16일에 해산된 한국광복단의 일상과 기억을 다시 논하는 이유는 그들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잃어버린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본의 공습에도 ,죽음을 불사하고, 불길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활약상에 비해,그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 사료는 부족한 상태이다.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고아복 이후,미군정에 의해, 그들의 구심점이 살려졌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즉 이 책은 한민족의 역사, 한국광복단의 자긍심과 사명감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논의함으로서, 한국광복단에 속해 있었던,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내기 위함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방공항전의 일상사, 떠돌이 생활을 하였지만,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에 대해 저항으로 일갈함으로서, 조선의 얼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조선 민족혁명단 부주석 김원봉 주도로 , 83명의 민족혁명당 청년들을 보았던 그 기간안에서, 한국광복단의 일원이면서, 여성 전투대원으로 일했던 수많은 여성 전사들의 목숨을 기억하면서, 1938년 일본이 난징을 함락하고, 조선 반도에서,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풍전등화에 놓여진 조선에서 수많은 한국광복단 소속 비밀요원들이 혁명투쟁의 의지를 불태우면서,지키고자 하였던 것이 무엇인지 상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일제치하에서,나라 잃은 아픔과 설움을 겪었던 그들이, 조선의용대 대원이었던 이들, 노선혁명당 간부였던 이들, 임시정부 서무국 과원이었던 이들,그들의 역사적 공적을 확인함으로서, 미군정에 의해 해산됨으로서,우리 역사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진 그들의 명예회복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