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 무소유 - 법정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열림원 / 2022년 3월
평점 :
담임선생이 슬리퍼를 벗어 무자비하게 가격했다. 처음에는 뺨을 십여 차례 때렸고, 난중에는 머리를 마구 후려쳤다. 코피가 터졌고 뺨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그래도 소년은 물러서지 못했다. 학교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옆 반 학생들까지 몰려와 발을동동 굴렀다. 다른 반 선생이 달려와 말리는데도 담임선생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소년은 급장에게 이끌려 우물로 갔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동 우물이었다. 얼굴을 씻고 옷에 묻은 피를 닦았다. 아낙네들이 혀를 찼다. (-19-)
"무자 화두가 좋다. 조주 스님은 화두 중에 무자 화두가 최고니라. 굳이 선방에 들어 화두를 들려고 하지 마라. 물 긷고 나무하고 밥하면서도 어디에서나 무자 화두를 놓지 않으면 된다."
그날 이후 동안거 기간 내내 행자 법정은 무자 화두를 들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의식이 흐려지지 않고 투명하게 깨어 있는 것과 같았다. (-72-)
다음 날.
하늘은 마술사가 눈속임을 하듯 개었다. 잔잔한 호수 같았다. 하늘은 어젯밤 땅엣허 벌어진 일들을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었다.불일암 둘레는 태풍이 할퀸 생채기가 곳곳에 나 있었다. 무너진 축대는 다시 쌓아야 하고,꺾어진 나뭇가지들은 스스로 치유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러나 찢어진 나뭇가지들의 상처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171-)
풀과 나무는 다들 자기 나름의 꽃을 피우고 있다. 이웃을 닮으려 하지 않고 패래이는 패래이답게, 싸리는 싸리답게 그 자신의 삶을 꽃피우고 있다.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저마다의 삶의 가장 내밀한 속뜻을, 꽃을 피워 보이고 있다.그래야 그 꽃자리에 이다음 생으로 이어질 열매를 맺는다.
우리들이 살아가느 고달프고 팍팍한 나날에 만약 꽃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꽃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곱고 향기로운 우리 이웃이다. 생명의 신비롸 아름다움의 조화를,거칠고 메말라가는 우리 인간에게 끝없이 열어 보이면서 깨우쳐 주는 고마운 존재다. (-242-)
상좌들은 법정의 유연을 따랐다. 관을 짜지 않고 수의도 입히지 않았다. 침상으로 사용하던 대나무 평상 위에 스승을 뉘이고 가사를 덮었다. 장례기간만은 스승의 유언을 따르지 못했다. 스승의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가려면 준비가 필요했다.그래서 삼일장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279-)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 2010년 23월 11일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 세상나이 79세에 눈을 감았다. 법정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 소식을 그가 남겨 놓은 유언 '무소유'에 대래서 ,동시에 뉴스에서 들었다. 그가 남겨놓은 삶의 철학적 향기는 만 12년이 흘렀으며,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 삶의 근원적인 성찰과 이어지고 있었다.
소설 무소유는 ,책 제목 그대로 법정스님이 삶의 마지막까지 추구하였던 화두, 소유하지 않는 삶, 무소유를 다루고 있었다. 승가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고유의 삶을 추구해왔던 법정 스님은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오게 된다. 30여권의 책을 써오면서, 자신의 소유의 책조차 남기지 않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가진 것을 적극 비워내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죽음 이후, 자신의 책의 사후 출간을 금하였으며,모든 삶에 대해,관조하고, 죽음조차 무소유로 이어지게 되었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고통과 번뇌,스트레스와 슬픔에 대한 해결책이 삶 속에 있다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논하고자 하였던 그의 삶이 여전히 우리 삶에 깊은 인사으로 남아 있었던 건 여기에 있다. 소설가 정찬주는 『소설 무소유』 를 통해 우리에게 물질적 소유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소유로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현대인들의 삶의 행복과 죽음에 대한 행복,이 두가지 가치가 서로 충돌되지 않으려면, 어떤한 삶을 살아가야 하며,어떻게 살아가야 자신의 삶을 놓치지 않는지,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었다. 견딤과 기다림, 삶에 대한 성찰과 관조, 나에 대한 소유에서 벗어나,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의 삶을 추구하였던 그는 자신의 육체조차도 무소유로 일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