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 - 나의 인생(人生) 에피소드
최민희 지음 / 삼사재 / 2022년 1월
평점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015년 11월 23일 저녁 9시 15분.
병원에 입원하신지 딱 20일 만에 유며을 달리하셨다.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단도직입적이고 쿨한 분이다. 이승과의 이별도 그랬다. (-5-)
우리 아버지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왜 저렇게 남의 일에 간섭을 할까 싶었다. (-57-)
대학교 1학년 새내기 때에는 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기 위한 학습이 진행됐다.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8억인과의 대화>,<아랍과 이스라엘> 등은 필독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등은 참고서에 가까웠다. (-101-)
<말> 지는 1985년 6월 15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진영에서 내는 홍보물들은 좋게 말하면 풋내기 물씬 나는 것들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149-)
2016년은 지역구내에서 내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해가 되었다. 나느 총선 당시보다 더 유명해졌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시작되면서 19대 때 의정활동이 자주 TV애 보도되었던 것이다. 윤전추와 필라테스 장비, 제2부속시 모래카메라, 박근혜 청와대의 95만원짜리 비싼 휴지통 등 무엇보다 의문의 침대 3개사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폭로된 방송통신심의위 관련 자료에서 당시 여당 쪽 방심윌의 '최민희 의원 1명 대하기가 10명 국회의원 상대하는 것보다 힘들다." 은 발언이 주목되었다. (-212-)
남편이 깊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당신은 최갑영의 딸이잖아. 장인이 얼마나 현실적인 분이었는데,이건 장인 딸답지 않은 허송세월이야" 하고 말했다. (-237-)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최민희 전 국회의원에게 아버지 최갑영은 특별한 존재였으며, 자신의 삶의 깊은 뿌리로 남게 된다. 막내딸로 태어난 최민희는 태어나자 마자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는 언니 덕분에 천둥벌거수이로 성장하게 된다. 집안에서는 공부를 최우선 과제로 두었건만, 부모님의 의도와 다르게 최민희의 오빠 언니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도서관이 아닌 놀기 바쁜 순간이었고, 최민희의 언니이자 첫째만은 우리가 말하는 모범생의 끝판왕이었다. 이후, 아버지 최갑영의 자랑이었던 언니는 국어를 전공하였으며, 장학관이 되었고, 막내딸 최민희는 국회의원이 된다. 22살 데모학생으로 찍혀서 구금되었던 시간들, 민언련 활동, 아버지는 그런 딸의 허물을 인정하고,이해하였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정직과 성실을 최우선하였기에, 최민희 스스로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던 지난날,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산이 바로 자신 최민희였음을 알게 되었다. 최민희의 정체성과 가치관의 근원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스스로 빨갱이가 되었고, 반골이 되었다.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던 이화여대 최민희는 불온서적을 읽었으며, 아버지의 생존법과 다른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이화여대 입학 후, 데모학생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어서, 불려갔던 지난날,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의 삶이 줄어든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묻어나 있었다.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의 삶이 다름을 인식하였고, 79학번 최민희는 80학번 남편 정수웅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하게 된다.
박근혜 탄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시민운동가 최민희는 그 로 인해 재판에 연루되었고,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2018년 재판에서 벌금 150만원, 5년동안 출마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최민희의 최근 횡보를 보면, 자신이 할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최민희, 아버지가 남겨놓은 마지막 순간 남겨놓은 유언, 어머니를 지키고, 어머니의 돈씀씀이에 대한 경계,그 하나하나는 최민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삶의 본질이며, 아버지의 삶과 인생은 최민희 전 국회의원의 삶의 뿌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