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법가의 나라였는가 - 죄와 벌의 통치공학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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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여기서 가없이 떨며 흔들리며 바라보는 군중의 육신과 질서의 준수를 외치는 세도가의 존체 모두를 품읊 만한 가장 그럴듯한 의지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중의 반유교적 행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중과 권력 사이에 흐르는 긴장의 빛깔들은 역사 속 예외적 장구함으로 확인할 때 조선의 형벌은 억압과 저항을 유인한 도구이자 강력한 계기로 때맟춰 되살아난다. 그것은 제압의 명분이자 동시에 분노를 유발한 체제의 집이었다.민중은 '숨기' 편했고 권력은 '가리기' 좋았던 유교 이데올로질의 정치적 회로판을 법가의 연장으로 해부하는 일은 그래서 이제라도 치밀하게 나서야 할 과업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14-)


정사(正史)의 기록에 나타난 총 '5,872'횔의 형벌 관련 언급사실은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519년 동안 스물 일곱 군주가 연평균'11.31'회씩 거론해야만 했던 조선의 '형벌'은 과연 치밀한 계산을 거친 통치 차원의 함정이었을까.이도 저도 아니었다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사회적 공포효과를 동원하려 했던 '예비장치' 였던 것일까. (-73-)


'죽임'의 결과물을 직접 1보게 함으로써' 죽음'의 고통과 물리적 단죄의 처연한 현장성을 즉발적으로 경험하게 했던 군왕의 의지는 이처럼 철저히 현장성을 동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태종조 이후 이같은 권력의 의도가 쉽게 정치화하는 경우는 흔했다. (-114-)


사실 징벌적 효과란 범법자 본인에 대한 가혹한 자각보다 이를 바라보거나 소문으로 접한 이들에게 한층 크게 다가서는 법이었다.즉 실제로 벌 받는 자가 겪게 될 아픔의 부피를 연상하거나 주관적으로 유추함으로써 그에 따르는 우회적 공포와 사회적 경각 조건이 점차 확산될 때 범죄의 억제와 민중의 자각은 배가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186-)


세종조 중반에 일프도록 좀체 제도화하지 못했던 범죄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절도방지였다. 예방책을 세우든지 아니면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처벌기준과 행형의 한계치를 확실히 설정하든지 어떻게든 얼개를 짜고 민중을 계도하여 자발적 복종 체제로 모두를 견인할 만한 공포의 룰을 만드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이미 밝힌 대로 엄청난 재해와 그에 따른 사회적 일탈은 각별한 리더십과 합리적인 정책 돌파구를 요구하고 있었다. (-221-)


사면은 곧 세조에게 있어 통치의 연장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과거 행적을 가리고 새로운 리더십으로 대안의 통치 경로를 각인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특히 통치 후반기에 이르러 한층 두드러져만 갔던 정치적 용인의 모습은 사면 정치의 강도를 잘 반영한다. 다음 표를 통해 그의 이같은 행적을 되밟아 보자. (-302-)


형벌은 형벌을 없애기 위함에 근본 목적이 있고 법 또한 법의 소멸을 위해 복무할 뿐이라는 철학적 변명 논리는 역설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군주는 제도 관찰사에게 하서하려 형벌에 신중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375-)


절도 제범의 사법처리는 계속되는 논쟁거리였다. 사회적 공포 효과의 확산이 먼저인가 아니면 백성의 인권과 민생적 자유 보장이 우선인가는 늘 논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겉잡지 못할 범죄자 숫자의 증가에 있다.아무리 겁주면서 범행 반발을 사전 제거하려 했어도 범행을 막을 길이 없었다는 시대적 절박을 설명할 수 없는 한, 당대의 법가적 해석은 중심축이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다. (-383-)


제도를 바꾸고 억조창생이 화평조건을 누리도록 가없는 개혁과 꿈속의 세상을 그려몬 들 도둑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느 현실 앞에서 왕은 아연헤 하고 있었다. 민생을 안온히 다스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무슨 큰잃을 도모할 것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설이자 조정의 대응능력이란 의외로 허약한 것이었음을 세삼 알아차린다. 그것은 왕권과 행정력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고 능멸과 야유 속에서 오히려 세상을 조롱하는 민중의 부정적 정치의식을 잘 드러내는 일이었다. (-452-)


유교국가의 법적 고민은 기실 여러 부문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변경 지역의 갈등 관리였다. 적용할 법이 없어 어렵기도 했지만 마련한 법조차 엄하게 적용하지 못하고 용서와 인위적(혹은 외교적) 배제로 일관한 무원칙함도 심각한 한계였다.그들이 야인(외국인)이기에 적용할 만한 국제법적 준거가 마땅치 않았다는 변명도 사실 현실성이 없는 얘기였다. (-487-)


빅토르 위고는 1802년에 태어나 188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그가 쓴 레미제라블은 상당히 널리 읽혀지는 소설이며, 장발장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있다. 빵 한조각 훔쳐서 4번의 탈출과 19년의 수형생활을 하였던 장발자의 측은함과 연민에 대해 나오고 있으며,그 소설만 읽을 땐, 너무한다 하였지만, 박종성의 <조선은 법가의 나라였는가>를 읽게 된다면, 그 소설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21세기 현대인들에게 배고픔으로 인한 절도는 이해와 공감으로 연결되고 있지만, 그 시대에는 절도는 하나의 큰 범죄였으며, 장발장정은 그로 인해 수형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00년 역사를 지닌 조선시대에는 절도는 ,군주의 명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거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을 하였다. 절도는 지금의 시선으로 봐야 할 것이 아닌, 그 시대의 행정적, 법치적 해석에 따라야 한다. 즉 천명에 의해 백성을 따르는 군주의 막강함 권력의 힘은 유교적 덕치와 법가 사상에 근간한 법치의 균형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었던 명분이 생겨났다. 소위 태조 임금 때는 나라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법치에 의존하였으며, 세종임금 대에 와서, 덕치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었다. 주인이 종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던 조선시대 초기의 형법은 세종임금 때에 와서야 , 종(머슴)의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조선의 역대 왕들에서 군주의 강한 의짇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세종은 덕치와 법치, 인치를 두루 써먹을 줄 아는 군주였다.이 책에는 두 명의 군주를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조선의 역대 임금중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세조임금과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적통 임금이며, 그는 폐위되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초기 통치는 잔인함과 멀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세조 임금은 왕이 되기까지 잔혹하였지만, 왕으로서 통치하는 과정에서 , 군주의 용서를 대대적으로 단행함으로서, 죽은 뒤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소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역대 대통령이 단행하였던 사면령을 세조는 써먹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배워야 할 점은 군주라면, 역사만 알아서는 안되며, 적절하게 정치적인 계산이 요구된다. 같은 형벌이라 하더라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 군주의 아량이 요구되며, 조선은 유교적인 탈을 쓴 법치국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시대 역사적 사건으로 알려진 사화들은 군주들의 정치적 튀기와 맥을 같이 한다. 또한 조선이 법치국가인 이유를 보자면, 3족을 멸하였고, 능지처참,효수라는 용어를 탄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으며, 유가적 통치와 법가적 통치를 병행하였다. 군주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었던 건, 그 시대에 신하의 상소문으로 인하여, 왕의 정치적인 상황과 문제의식을 공론화하였던 것이 일정부문 반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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