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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ㅣ 걷는사람 시인선 51
이병철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1월
평점 :
조각 비누
소멸하고 싶어도 소멸할 수 없는 존재에게선 라벤더 향기가 난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재단이 있다. 오래전 제사장은 물두멍에 물을 받아 손발을 씻었는데 그때 향유는 물과 살갗 사이에 투명한 막을 만들어 죄와 영혼을 분리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믿음이 액화된 오늘, 향유는 제법 단단한 것으로 그 물성이 바뀌었지만 죄의 속성은 여전해서 피처럼 붉은 얼룩부터 뜨거운 체액까지, 몸을 더럽히는 것들은 씻어내면 그만이다. 더러움을 씻어 깨끗함을 입히는 신의 은유, 그러나 몸피가 엄지손톱만큼 작아져 이제 거품조차 낼 수 없는 불멸도 있다. 삶도 죽음도 아닌 시간들이 조각조각 쌓여간다. 한때 신이었던 향기가 하얗게 굳어 있는 재단 (-17-)
몽 유도원
우리가 마주 보고 누웠을 때
당신의 심장은 아래로 쏟아지고
내 심장은 쏟아지는 세상을 받아냈는데
내 팔배개에서 자꾸만 강물이 흘러
당신 귀는 깊이 잠들지 못했네
내 피가 실어 나르는 복숭아 꽃말을
다 듣고 있었네 그때 나는
벌써 죽은 사람이었고
당신은 살아서는 다시 못 꿀
꿈처럼 가엾이 아름다웠네(-45-)
오늘 같이 있는 사람은 내일 없는 사람
1.
너는 내 눈이 아니라 내 눈에 고인 노동을 보았지
너는 내 말이 아니라 내 말에 스민 실패를 들었지
너는 내 숨이 아니라 내 숨에 숨은 절망을 삼켰지
너는 내 혀가 아니라 내 혀에 번진 중독을 햝았지
2.
오늘 같이 있는 사람은 내일 없는 사람
그게 미리 슬퍼서 너를 만지지도 못하고
하룻밤만 같이 살자는 말 못한 채 눈도 코도 없이 혼자 살았지
3.
나와 ㅇ맀는 동안 나는 죽어 가는 한 마음을 사랑했지
단 하루만 나에게 아름답고
내일부터 너에게만 아름다운 세상에서
어떤 마음도 다시는 태어나지 못했지
4.
그저 한숨 자고 싶어 죽는 사람이 있어,너는 말했지.(-89-)
플로어 스탠드
너는 등대가 아님에도
바다의 귀를 지니고 있어
어두워지는 무렵의 내 울음을 잘 들을 수 있지
너는 날 수 없는 새
빈 늑골에다 무채색을 채우는 백상아리 주검
나는 그 색체를 생각의 칼로 떠서
음미하기를 좋아하는 미식가다
그게 아픈 너는 내 생각을
달콤한 촛불의 춤으로 바꿔 놓으려 하지
내 눈썹에서 희미한 꿀 냄새가 풍기는 이유야
내 눈물은 내 눈으로 와서 노래를 퍼붓는 비가 된다.
비를 맞으면 허무의 높이를 딛고 선
발가락이 뚝뚝 부러져
그때 오렌지색 머리칼 속에서 네 눈망울은
고열로 부풀어 오른 어린 행성이야
땡땡 부어오른 붉은 아가미야
오늘도 나는 네 머리칼 속으로
숨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혀를 내밀어
네 금속 척추를 아름다운 얼음으로 바꾸는 중이지
두근거림보다 환한 새벽이 밀룰로 오는 소리 들으며 (-123-)
시에서 느껴지는 종교적인 경건함이 시와 사물을 엮어나가는 사랑의 메세지가 되고 있었다.중교적인 무거움과 사랑의 진지함,이 두가지가 섞이면서,인간의 욕망은 합일을 이루게 된다. 사랑하되,오감을 충족시키는 그 깊은 울림 속에 감춰진 우리의 신뢰에 대한 달콤함,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그 사랑에 대한 중독되는 속성과 본질에 따라가게 된다. 끌림과 이끌림, 매력과 존중,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보호해주고, 서로를 치유하고, 안전한 곳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다양한 핑계와 함께하게 되며, 내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시 한 편에 사람이 있었으며, 사람을 응시하는 또다른 사람이 있었다. 눈을 바라보면서, 그 눈 너머에 숨어있는 또다른 숨어있는 고유의 깊은 메신저,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명분을 찾게 되고, 눈 속에 감춰진 정신적인 요소를 찾아나갈 수 있다. 또한 말에서 얻어지는 한 사람의 실패에서, 인생의 고뇌를 충분히 느끼며 살아온 과거의 인샘이 있었으며, 존재하고 이해하며, 함께할 수 있는 근본적인 가치를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시인 이병철이 말하고자 하는 건, 성경적 가르침, 원죄와 사랑에 대해서 ,현대적인 기준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삶에 깃들여진 노동과 실패,젋망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요소를 찾아나간다. 그 정신적인 요소가 나의 마음을 깊이 울리게 된다. 나에게 놓칠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누구나 보고,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의 틈바구니 안에서, 성경적인 이해와 회계, 더 나아가 인간적인 삶의 근원적인 통찰과 서로 엮이게 되고, 나와 타인의 개성을 서로 상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