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경성의 음악공간을 산책하다
신혜승.김은영.이수정 지음 / 우리에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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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 공회당이 지어진 지도 어언 13년이 흘렀다. 경성공회당에서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양한 양상의 공연과 집회가 열렸을 뿐 아니라 민간 무선실험방송이 실시된 이후 1933년 4월에는 우리말 방송도 시작되었다.이어 6월 2일에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 음악회가 개최된다. 이날 밤 박경호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으며 여기서는 쇼팽의 폴로네즈가 울려퍼지게 된다. (-39-)


고향을 넘어 <향수>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채동선을 통해, 식민지 시대에 '고향'을 노래한다는 것은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함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더욱 불안, 고통, 애절함 등으로 느껴질 수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향수>라는 작품에서 우리 조국은 차마 꿈엔들 잊힐리 없는 공간으로 공명된다. (-107-)


경성찬양회를 주도한 김인식과 김형준, 김영환은 모두 평양 숭실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897년 평양에서 문을 연 숭실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성경, 산수,학문, 역사와 함께 음악 과목을 필수로 지정하였다. 음악 전공이 없었지만 한국 근대음악을 선도하게 될 음악가들을 대거 배출한 것은 숭실의 남다른 교육철학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48-)


궁궐은 국가의 공적인 통치행위가 진행되며 국왕이 거주하는 일상공간이다. 국가와 왕실의 건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웅장하게 지어 철저하게 관리한다. 조선왕조에 대한 지배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일제는 경술국치 이전부터 궁궐을 훼손하고 있다. 왕이 거처하며 업무를 수행하던 정궁을 비롯하여 전국에 산재한 국가시설을 철저하게 발괴하며 조선을 지우거나 훼손시켰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19만 8천 평에 이르는 경복궁 전체를 왕가로부터 강제로 양도받았다. (-199-)


일제는 공진회에서 5년간의 식민통치 업적과 일본의 선진문물을 과시하며 조선의 우진성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조선박람회는 식민통치 20년이 지난 시점이니 그동안의 통치성과가 안정적이며 우수하여 조선의 삶이 발전되었다는 점이 잘 드러나도록 기획하였다.
조선박람회는 전시관 외관이나 전시 내용에서 조선식과 조선색을 가지되 현대적인 모습이 드러나도록 구성하였다. (-263-)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이듬해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그리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상실하게 된다. 조선의 수도 서울 한양은 경성으로 바뀌었으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조선의 수도 서울 경성은 역사성과 시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100년전 조선의 모습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인구 100만 경성이 될 수 있었던 건,일본의 기획된 의도이며, 조선의 낡은 풍토를 지우기 위해서다. 조선의 근대화로,선진문물이 한반도에 들어왔으며, 경성은 일본에 의해 기획된 제국주의 도시로 바뀌게 되었고, 각각 구역화하게 된다. 북촌과 남촌, 궁궐로 구분지었던 그 시절, 근대화 물결의 음악은 1920년 지어진 경성공회당에서 시작되었으며,수많은 근대 음악가를 양성하게 되었으며,그 이전의 음막의 형태와 차별화하고 있다. 서양식 음악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면서, 방송을 타기 위한 무선통신 기술과 음악이 서로 접목되었다. 


한복을 입은 음악가,그리고 양복을 입은 근대적 복장을 입은 음악가가 공존하는 그 시기였다.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음악으로 해소하고자 하였으며, 음악이 가지는 고유의 서정성에 역사성과 시대성을 음악이 표현하는 새로운 음악사조가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쇼팽을 모르는 상태에서 쇼팽음악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릴 수 있었다. 즉 생소하였고,이질적이었지만, 그들은 근대화에 적응한 음악을 소비하였고,습득하였다. 음악은 그들에게 새로운 양식이 되었고, 유학에서 돌아온 피아니스트 박경호의 탁월한 합창곡은 베토벤, 슈베르트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으막 뮤지션이 선보였던 그 시대에 모던 보이가 등장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왕실에서만 쓰여졌던 궁중음악이 대중성을 지닌 음악으로 바뀔 수 있게 된다. 


한편 음악은 민족주의 색채를 가지고 있으면서,그것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작사 문일석, 작곡 손목인, 노래 이난영으로 이루어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를 잃고 ,한없이 슬픔과 괴로움에 침전하는 조선인의 나라잃은 울분과 설움이 동시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안에 은유와 상징으로 , 민족주의적인 색을 희석시켰으며,금지곡으로 지정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음악은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인해 제한되었고, 핍박의 대상이었으며, 부정과 긍정 속에 나라의 국권 회복을 염원하게 된다. 살아생전 나라가 조서인에게 돌아오는 것을 염원하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판소리 명창과 베토벤의 장송행진곡이 서로 어우러지는 그 시대의 근대화된 음악 문화를 이해하고 접목할 수 있다.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깊이 음미하는 것이 쉽지 않은 그 시대의 음악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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