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정면
윤지이 지음 / 델피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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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
누군가의 투신이다. 분명하다. 잘 모르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다. 심장이 두방마이질 쳤다. 머리가 끔찍할 정도로 맑아지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채 수숩하지 못하고 도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방은 아직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다. (-9-)


그녀가 나가자마자 나도 곧바로 진료실을 나왔다. 나는 여수진 환자를 지나쳐 그대로 병원 문을 나섰다. 대기실엔 다음 환자가 있었고 송 간호사의 시선이 나를 쫓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14-)


이제는 잘 해낼지 모르잖아.
아내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아이처럼 제멋대로인 데가 있지만, 그녀가 정신과 의사로서 훌륭하다는 걸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내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세상엔 그 무엇도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걸. (-34-)


어둠의 정면을 보고 있는 지금, 나의 의식은 그 어느때보다 또렷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는 로프 하나만을 의지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내 안에 더할 수 없는 고도의 집중력을 솟구치게 했다. (-51-)


나는 가만히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밤사이 영영 잃을 수도 있던 얼굴. 숨소리 사이로 아내는 다시 몇 번쯤 뭔가를 중얼거리다 말았다. 그리곤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알 수 없는 여자.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67-)


아내와 양부는 물이 흐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다 가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보면 볼수록 둘은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이 둘은 가족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봐도 양부와 닮았다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양부가 입을 열었다. (-88-)


꾸밈없이 하나로 길게 묶은 머리.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 한 번씩 말끝에 붙는 옅은 웃음. (-115-)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선반에 놓인 메칸더브이를 집어 자리로 돌아왔다. 마징가제트만큼이나 때가 탄 메칸더브이는 내 팔뚝보다 조금 작았다. 나는 이 건강하고 유치한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왠지 몸속 어디에서 뜨거운 뭔가가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모든 악에 대항해 지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151-)


창문을 통해 조명이 태양처럼 내 얼굴에 비쳤다. 아내는 자신의 그리스어 교본을 찬찬히 넘기고 있었다. 표정은 무심했다. 이따금 한 페이지에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다른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 (-161-)


현대인들의 삶에서 흔하디 흔한 속담이 등장한다. 속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문제,고민, 심리적인 이유들에 대해서는 즉각 즉각 해결해주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한다. 그 속담 저너머에는 전문가에 대한 불신,지식인에 대한 위선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우리가 안고 가게 되는 여러가지 심리적인 이유들이 고찰되고 있었다. 소설 <어둠의 정면> 또한 그런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은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착각할 정도이며,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쓰여진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민형기는 정신과 의사이며,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골치아픈 것을 풀어가는 엘리트 의사의 표상이다. 그는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돈이 궁하지도 않다. 하지만 남의 문제를 풀어가다 보니,자신이 문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된다.아내와의 관계도 문제가 없으며, 정신과 의사 민형기조차 문제가 없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묘하게 잿빛 어둠이 드리워지는 분위기, 조용조용한 성격을 지닌 아내의 성향은 어릴 적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트라우마가 있다. 남편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민형기조차 마찬가지다. 삶의 단조로움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으며, 내 삶의 희노애락 저변에 깔려 있는 여러가지 발자취가 느껴지며, 알몸으로 서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본 민형기는 쥐구머으로 자꾸 숨어진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주인공의 삶에서, 조용한 아내의 일탈이 그려지고 있다. 즉 아내의 일탈은 아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남편의 문제이기도 하다. 원인제공자로서, 보여지는 정신과 의사 민형기는 남의 이혼 문제, 부부 관계 문제는 해결하면서, 정작 자신의 아내의 문제, 부부 문제, 민형기 자신의 문제는 플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삶에서 흔히 말하는 '헛똑똑이'에 대한 다양한 기준과 원칙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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