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 아버지를 인터뷰하다
김경희 지음 / 공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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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아빠가 떠났다.

열흘 전쯤부터 큰 태풍이 여러 차례 지나갔다. 그날도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렸고 뉴스에선 태풍6호가 지나는 중이라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날씨는 하늘의 기분'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그 말이 맞는다면 하늘의 기분은 2주 째 변화무쌍한 게 틀림없다. 날씨에 꽤 민감한 나는 태풍이 다가오고 지나가는 동안 내내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태풍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날 아침, 잠든 자식들이 깨어나기를 밤새 꼬박 기다리신 아빠의 호홉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우리 남매들은 지난 밤 어쩐지 모두 아빠 곁으로 모여들었다. 밤늦도록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고 배가 고픈 나머지 크림빵을 흡입하듯 먹어치웠다. 그리고 여유롭게 커피를 다 마셨을 무렵에야 아빠의 호홉이 점점 더 잦아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빠가 곧 우리 곁을 떠나실 것을 직감했다. 너무 슬픈 일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데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30-)


그날 나는 단성사가 있던 자리도 들러보았다. 물론 영화관도 ,요구르트를 팔던 다방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거리 한복판에 당시 서서, 30년 전 그때를 떠올려본다. 가족이 당시로는 파격적인 베드신이 있던 영화 <장군의 아들>을 함께 보던 시간들과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던 기억, 시큼하고 달달했던 요구르트의 맛까지, 그날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뭔가 화가 잔뜩 난 채 우걱우걱 밥을 입에 밀어 넣으며 속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건 아냐, 이건 정말 싫어! (-65-)


1987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에도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열렸다. 당대 최대의 라이벌이던 이만기(현대중공업) 와 이봉걸(럭키금성)의 맞대결로 개최 전부터 화제가 된 경기였다. 당시 정치판에 '3金' 이 있었다면 모래판ㅁ에 '3李' 가 있었다. '3李'의 선봉장은 단연코 이만기였다. (-121-)


돌이켜보니 아빠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는데 , 나는 아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놀기 좋아하는 것도 아빠고,귀가 얇은 것도 아빠이며, 남을 탓하지도,변명하지도 않는 것이 아빠라는 사람인데 말이다. 아빠는 이래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두 가지의 단점만 보던 나는 아빠의 수많은 장점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 명명백백한 나의 실수였다. (-200-)


아무튼 그렇게 자식에 대한 애착이 많았어. 그래서 네 엄마가 힘들게 살았지. 깡패, 건달 이런 출신의 사람들은 말이다. 집에 쌀이 떨어져도 그걸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이야.쉽게 말해서 솥에 끓일 것이 없어도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은 마셔야 하는 허영이란 게 있지. 나는 특히 그랬어. 없이 살아도 물 한잔 마시고도 고기라도 먹은 것처럼 이쑤시개를 물고 다니고 그랬으니까.한마디로 폼이 중요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나 같은 사람들의 가족은 힘들 수 밖에 없지. 폼이 중요한 사람인데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살아가려니 모두가 힘들게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275-)


한 사람의 인생을 기록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스펙트럼 안에 나의 가까운 사람, 가정에서 아웃사이더로 존재하는 아버지라는 존재, 어렵고, 불편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아버지에 대해서 차곡차곡 담아나가고 있었다. 이 책은 1977년생 저자가, 1938년 생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채워 나가고자 한다. 삶의 기준,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너무 다른 이질감, 그래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딸과 아버지가 기질과 성격, 삶까지 너무 닮았고,도플갱어처럼 비슷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편함이었다.무능하고, 가오와 폼생폼사로 살아온 그의 인생이야기 뒤에, 시골 익산에서 핵인싸로 살아왔던 지난날을 버리고, 서울에서 택시 운전기사로 살아온 그 삶이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깡패,.건달과 같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집에 쌀이 떨어져도, 주변 사람을 챙겨야 하는 스타일, 자신의 가오는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으로, 무능한 한량과 같은 인생이 공존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 지극히 멋있어 보일 수 있지만, 내 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무능한 존재, 그것에 대한 이해와 공감 저변에 깔려 있는 누군가의 삶에 대한 용서가 함축되어 있다. 이 책의 뒷 부분,100개의 아빠에 대한 인터뷰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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