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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평점 :




'성속'이라는 이분법적 대결구도를 깨고 자신 역시 세속 안에,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란 사실을 교회가 받아들이기까지는 수 세기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세계대전 후 잿더미 위에 나 앉은 인류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 에 이르러서다. (-7-)
붓질한 색면을 뜻하는 '얼룩 macchia'이라는 이탈리아 말에 어원을 둔 마키아이올라로 불리던 그들은 당장대 이탈리아 여느 젊은이들처럼 이전 시대 낡은 권위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시대적 요구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정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신생 정부에 깊이 실망했다. 그들은 이런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혼란기 중 더욱 황폐해진 농촌의 빈곤과 노동자 들의 비참한 삶 등,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았다. 현실에 대한 직시는 곧 현실에 대한 고발이었다. (-60-)
흔히들 화면 속 바르톨로메오로 알려진 인물의손에 들려있는 인간 껍데기가 미켈란젤로 자신이며 바르톨로메오는 다름 아닌 아레티노리는 유독 그에게 혹독한 비평을 쏟아붓고 비평가일 거라며 흥미롭게 설명하곤 하지만, 화면 오른편 막 부활하고 있는 망자들 무리 가장 밑바닥, 고개만 간신히 땅으로 내민 수도자 복장의 인물을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다. 격정에 찬 종말론적 설교로 피렌체 사람들의 정신세계 극적으로 상환할 때까지 4년간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도미니코휴ㅚ의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1498 다. (-113-)
도록에서 우연히 이 작품을 발견하곤 꼭 한번 직접 복셌노아고 마음먹었었다.실제로 그 이후 몇 번의 방학을 나는 이 그림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경비 마련을 위해 일하며 보내야 했다. 막상 찾은 바젤이 '스위스' 라는 이름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잘 닦인 도로와 번쩍이는 통유리로 치장된 도시여서 실망하긴 했어도 거기에 홃바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미술관의 모든 방을 건너뛰고 단숨에 작품이 걸려있는 곳으로 향했다. 완전히 다 소진된 육신이 거기에 누워있었다. 한참을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165-)
지평선 너머 주먹을 치켜든 벌거벗은 거인이 걷고 있다. 땅에서는 사람과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혼비백산 하고 있다.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은 멍청한 당나귀 뿐이다. 거인은 누구인가? 조국을 짓밟은 프랑스 군대, 전쟁의 참화에서 사람들을 지키려는 스페인 민족주의 화신 등 모호한 그림처럼 사람들의 해석도 엇갈린다. (-237-)
예술과 종교의 간극, 예술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하는 신학인이 바라보는 예술의 향연에 접근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장면 속에서, 하나의 그림 속에서 예술가가 바라보는 것과 역사가가 바라보는 것, 신학인이 바라보는 것은 큰 차이를 볼 수 있다. 살아생전 위대한 예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 그 안에 채우고자 하는 디테일한 것 하나 하나 꺼내려는 것은 예술이 조예가 깊은 사람, 예술 덕후라면 반드시 욕심이 가는 대목이다. 신학인 장동훈 천주교 사제는 자신의 관점으로 종교의 뒤세 감춰진 인간의 본연적인 성품에 접근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려낸 위대한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을 떄, 저자는 다른 부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과 인물 묘사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적인 것, 심리까지 캐치하려고하는 예술적 욕구가 , 그 안에서 내가 평생에 걸쳐서 얻을 수 없는 생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욕구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겠다는 의지로 연결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중요하지만, 저자는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그 예술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내고 해석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하나하나 관찰해 본다면,그 생각과 가치를 기준으로 나의 예술적 배경을 채워나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