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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가 이건희
허문명 지음 / 동아일보사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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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맢서 1993년 2월 미국 LA 에서 열린 전자 관련 사장단 회의 발언에서 이런 심경의 일단이 읽힌다.
"내가 내 재산 늘리려고 이렇게 밤잠 안 자고 떠드는 것 절대 아니다. 재산 10배 늘어봐야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의 '이자의 이자의 이자' 로도 몇 대는 살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 아니다. 명예 때문이다. 성취감 때문이다. 성취감은 여러분, 상성그룹, 우리나라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내 개인 양심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고 싶다." (-29-)
"회장이 30시간 이상 주무시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비행기에서 주무실 것이니 수행팀장은 행운'이라는 농담까지 돌았스니다. 그런데 왠걸, 회장이 자리에 앉자 마자 가방에서 문서 두 개를 꺼낻저니 '읽어보고 이유와 대책을 분석해 보고하라' 고 하는 것 아닙니까/'후쿠다 보고서'와 '기보 보고서'였습니다." (-81-)
홍 전의원이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건희는 어쩌다 입을 열면 싱거운 소리를 잘했는데 더러는 충격적일만큼 독특한 시각과 발상을 내비쳤다. 그런 말을 앞뒤 설명도 없이 '본체'만 툭툭 던졌다. 그것들이 제각기 연결돼 하나의 얼개를 이루었다. 여러 구조물들이 공학적으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돼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듯 , 한 가닥의 실만 잡아당기듯 실타래 전부가 풀려나오듯,그의 얘기해보면 음악이나 미술에서 화두를 열어도 기업 경영, 국가, 인류에 관한 주제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북같은 친구였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오는 북, 그것은 묵상과 직관의 힘이었다." (-177-)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도 브랜드 인지도가 없으면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1990년대 초반에 수출 협상을 하러 미국에 가면 속상할 때가 많았습니다. '삼성 TV 가 소니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 왜 안사느냐'고 따지듯 물어보면 '거실에 소니 TV'가 있어야 격이 올라간다. 아무리 듣보잡 TV 를 갖다 놓으면 집 품격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고, 그 말에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즈음 회장이 갑자기 비서실에 '전 세계 주요 공항 카트가 몇 개나 되며, 누가 만들고 있고, 카트에 붙이는 기업 광고는 어떻게 운영되는지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삼성이 광고를 할 경우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직접 카트를 만들어 공급해줄 수는 없는지, 심지어는 카트를 가져다 분해해 삼성 중공업이 만들경우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까지 계산해 보고하라는 거였습니다.공항에 가면 누구든 카트를 쓰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30 전만 해도 해외여행 다니는 사람은 어느 나라든 상류층이었고요.회장은 여기에 착안한 거죠.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공항 곳곳에 삼성 로고가 붙은 카트의 70% 에 삼성로고가 붙었지요.그야말로 삼성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고, 그건 전적으로 회장 아이디어였습니다." (-237-)
다시 정양모 전 관장의 말이다.
"이건희 회장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놓은 10억원이 아니었다면 발굴은 불가능했습니다. 고인이 참으로 대단하셨던 게 나중에 떠들썩하게 발굴이 이뤄졌는데도 우리한테 혹은 공개적으로 당신이 도와줘 발굴이 이뤄졌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건을 보고 싶다거나 하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정말 大人이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342-)
대한민국은 지금 5000만 인구에 3만불을 당성한 선진국이 되었다. 후진국 , 못사는 나라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3만불-5천만 인구를 가진 국가로 경제적인 힘과 군사적인 힘, 문화적인 힘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인 결함은 있을지언정, 박정희 대통령과 삼성의 이건의 회자의 몫이 차지하는 부분을 놓칠 수 없다. 전 생애를 기업가 정신으로 살아오면서, 삼성을 국내 1위의 기업에서, 세계 1위가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직관과 묵상으로 다져진 통찰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남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꺼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찾게 된다.그 시작점이 1993년 프랑크투르크 선언에 있으며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는 지시를 이건희가 하게 되었다.
그의 생각이 먹혀들었던 건 IMF 외환위기에서 삼성이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 있다. 반도체가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하였고, 기존의 소니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가치를 삼서이 돇점하게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그 시절,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직관과 아이디어는 말은 어눌하지만, 항산 시선은 외부로 향하였고, 도전과 집념으로 기업을 일구어 나갔기 때문이다. 가업을 하는데 있어서 유연함과 대범함, 남들보다 앞서고자 하는 의지, 나눠먹는 것을 미덕으호 하였던 그 시기에 최고가 되는 것이 살안남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찾아냈고, 미국 출장에서 보았던 삼성 제품의 현주소를 보면서, 전면 기업 혁신을 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내와 집념으로 관료 사회에 가까운 삼성 조직의 리더들을 설득하였고,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삼서의 기업 가치는 올라가게 된다. 현대의 정주영과 비견되는 삼서의 이건희 리더십은 말은 어늘한 눌변이지만, 생각이 깊은 통찰과 미래를 앞서 나가는 것을 우선하는 것, 기업 경영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끊입없이 파고들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1993년 이건희가 추구하였던 삼성 新경영 선언에 있으며, 대한민국을 BEFORE 이건희와 AFTER 이건희로 구분하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