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공무원의 우울 - 오늘도 나는 상처받은 어린 나를 위로한다
정유라 지음 / 크루 / 2021년 11월
평점 :
그리고 아빠에 대한 무서움이 원망스러움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이전에도 수도 없이 싸웠겠지만 그들의 부부 싸움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서산에서 사글세로 얻은 단칸방에서 할머니의 음력 생일과 내 남동생의 첫 돌이 겹쳐서 할머니 집에 가네 안 가네 하는 것으로 싸웠던 기억이다. 살벌한 싸움이었다. 아빠의 큰 고함이 단칸방을 넘어갔다. 아빠인지 엄마인지 누가 원망스러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그저 그 상황이 빨리 끝나길 방구석에서 숨죽여 울 뿐이었다. (-37-)
한번은 내가 "엄마가 날 위해 엄마의 20년을 희생한 거 알아! 고맙고 감사해! 하지만 나도 엄마를 위해 내 인생전부를 엄마한테 바쳤어!"라고악을 쓰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날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그리고 다음 날 엄마가 뭔가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난 '사랑스러운 딸' 이 아닌 '원수 덩어리' 가 되어 있었다. (-97-)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데 집에만 있으니까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걸까? 바로 다시 전화를 드린다고 하고 복지 부서, 어르신 복지 부서 등에 전화해서 문의해 봤지만 어르신을 도와드릴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나온 성인한글교육 학원을 찾아 그 번호를 알려드렸다. 유료이긴 하지만 상담을 한 번 받아 보시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우욾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 자신의 우울증도 어찌하지 못하면서....(-148-)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지 10년 만에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항암치료제를 먹은 지 3일 째에 배가 점점 나오더니 고열이 나서 응급실로 오게 됐다고 했다.복수가 가득 차 있었다. 엄마는 입원 내내 배에 구멍을 뚫어 복수를 뺐고 ,복수를 빼는 이뇨제를 먹었다. 당연히 엄마에게 아빠도 남동생도 병간호를 같이 할 것을 말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네 애비는 지금 무릎이 너무 안 좋아서 병간호를 못 해. 그리고 네 남동생도 취업 준비하느라 여기 와 있을 시간이 없어. 너도 시간 안 되면 안 와도 돼. 혼자 있으면 돼. 부담 갖지 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나는 병간호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이번에도 엄마의 의무를 면제해 준다. 더 이상 병간호는 온전히 나의 몫이 아님을 알았던 나는 엄마에게 확실히 말했다.(-185-)
우울과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작가 정유라는 자신의 과거의 우울하고,불행했던 삶을 기록하게 된다. 폭력과 폭언에 의해, 어릴 적부터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던 과거의 날들, 무능하고,무식하고, 가난하였고,빈곤한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서 저자가 선택한 일은 공무원이다.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밤낮없이 노량진으로 향하였고, 지하철 공간에서 책을 펼쳐들면서, 문제만 보면 즉각 답을 맞출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의 폭언과 폭행은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음력 생일과 남동생의 첫돌,이 두가지 우연이 가족의 불행의 씨앗이 된다. 살벌한 그 모습을 어릴 시절 보았고, 우울과 공황장애로 인해 자해와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우울을 조금씩 극복하게 된다. 하지만 엄마의 원망과 서러움은 온전히 딸의 몫, 저자의 몫으로 남기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이 삶의 원인은 아버지에 있지만, 어려서부터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 길들여진 무기력한 엄마의 모습이 딸에게 답습되면서 나타난 문제이다. 사로에게 의존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수 없는 상황, 이런 상황이 서로의 불행을 갉아 먹고 있으며, 부모의 삶이 자식들의 삶으로 되물림되고 있다. 불행이 불행의 꼬리표를 만들어 내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책 한 권에서 ,저자의 불행한 삶을 보면서 속상하고 씁쓸하였다. 내 주변에,내가 어릴 적 보았던 그 모습이 저자에게 있었다. 말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어느 순간 주먹이 날라가고, 발이 날아가게 된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전형적인 폭행 가정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엄마에게 재생불량 암이 걸리고, 다시 재발하면서, 삶의 끝자락 까지, 자녀에게, 남편에게 자신의 짊을 지우지 않겠다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딸에게는 또다른 상처가 되고,후회가 될 수 있다.불행이 담겨진 우리의 아픔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