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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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독자들도 알다시피 현대 중동은 1차 세계대전(1914~1918) 뒤에 형성되었다. 이전에는 서아시아의 정치 풍토가 지금과는 판이했다.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일파크, 터키,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 나라들이다. 이들 모두 수백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속령이었다가 제국이 해체되면서 탄생한 국가들인 것이다. (-11-)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공개되었다.독일 외교관련 기록보관소에 근무하는 연구원이,1914년 8월 1일 엔베르와 탈라트가 독일 대사 폰반겐하임과 만난 자리에서 세계 최강의 전함들 가운데 하나인 술탄 오스만 1세 호를 독일에 넘기겠다는 뜻밖의 제의를 한 문서를 찾아낸 것이다. 폰반겐하임도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독일함대 장교들이 중요한 신형 전함의 도착을 학수고대하다가 그 배가 처칠에 의해 압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에 빶닌 것 같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101-)



그레이가 콘스탄티노플 협정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인도의 무슬림 여론에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이 그때까지 남아있던 최후의 무슬림 독립국, 따랏허 중요성이 적지 않은 오스만제국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만일 양국의 협정 내용이 공개되면,"영국 정부는 협상이 진행되는 내내, 어떠한 경우에도 무슬림 성지와 아라비아는 독립 무스림 영역으로 남겨둘 것을 요구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해달라고 러시아 측에 요청한 것도 그래서였다. (-212-)


영국과 프란스 내각은 1916년 2월초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협정 내용은 물론 ,심지어 그것의 존재마저도 비밀에 부쳤다. 연합국이 전후 중동에 관련된 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그 일이 일어난 지 거의 2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협정에 대해 알고 있던 소수의 영국관리들도 그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대다수 영국인들은 프랑스에 지나치게 양보를 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293-)


1916년 가을부터 1917년 가을까지 지리멸렬을 면하지 못한 연합국 정부들과 달리 오스만 정부는 여전히 굳건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형국이 벌어진 것이다. (-361-)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 법이다. 영국 외무부가 모종의 일을 꾸민다는 소문에 독닝언론이 수선을 떤 것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1917년 6월 로널드 그레이엄은 하임 바이츠만으로부터 ,정부와 밀착관계로 유명한 베를린엣거 발행되는 신문 한 부를 전해 받았다. 신문에는 이집트와 인도를 이어주는 팔레스타인 육교다리를 확보하기 위해 영국이 시온주의 지지를 고려하고 있고, 따라서 독일이 선수를 쳐 시온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영국의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456-)


엔베르 파샤도 언젠가는 아시아의 모든 터키어족을 오스만의 지배 아래 통합시킬 꿈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그것을 자신의 구체적 정치 현안으로 만든 것은 러시아 제정의 붕괴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보인 뒤였다. (-536-)


프랑스는 그 상태에서 만일 파이살을 시리아의 대변자로 인정해주면 시리아를 영국에 빼앗길 것으로 보고, 자신들도 별도의 시리아 지도자들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시리아의 가장 명망 있는 인사들만 해도 프랑스에 다년간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프랑스 외무부의 후원까지 받고 있었으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언어와 종교는 비슷해도 시리아인은 아랍인이 아니고, 그러므로 자신들도 프랑스의 지도를 받는 그들만의 나라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여 프랑스 정부에 힘을 보태주었다. (-603-)


엔베르의 동료였던 청년튀르크당이 제망 파샤도 러시아의 권고로 1920년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군사고문으로 활동했다. 영국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부분이 그 같은 행동이었다. CUP(청년튀르크당),전쟁에서 패하고도 영향력을 계속 행사한 독일,범이슬람주의, 볼셰비키, 러시아 이 모든 요소가 제국을 형성한 이래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던 영국제국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697-)


처칠은 정치적 유대인에 대해서는 세 종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첫째, 그들이 속한 나라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 둘째, 파괴와 폭력적 성향이 강한 국제적 볼셰비즘의 신조에 물든 사람, 셋째, 하임 바이츠만을 따라 시온주의의 노선을 걷는 사람이 그것이다. 그는 또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은 러시아 등지의 나라에서 자라난 대다수 유대인들에게는 볼셰비키가 되든지 시온주의자가 되든지, 양단간의 선택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도 믿었다. (-781-)


차나크 위기와 휴전 협상은 영국에 두 가지 뚜렷한 양상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하나는 프랑스와 관련된 것으로, 휴전협상에 참여한 프랑스 대표가 터키와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부추기며 악의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터키와 위기를 겪는 내내 프랑스가 보인 행동의 결정판으로 그런 적대감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영국으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영국 지도자들도 이제는 프랑스가 영국의 중동정책에 실망해 영국과의 제휴를 재평가하고 종국에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프랑스를 새롭고 걱정스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847-)


1919년 조선한반도 땅에는 3.1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유럽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세르비아 선전보고 전보'가 있었고,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이 당시 유럽은 복잡한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오스만 제국과 영국의 관계, 일본와 영국 관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견제까지 맞무려 잇게 된다. 제1차 산업혁명이후, 유럽의 패권을 쥐었던 영국은 러시아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 중동정책을 새롭게 하였고,러시아 견제정책을 펼치게 된다.이 당시 영국 총리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였고,그는 육궁장교에서, 총리가 된 케이스였다. 반면 그가 있었던 당시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으로서 영구의 바다를 책임지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책은 중동이라 부르는 유럽과 아이아를 아우르는 그 땅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열강의 힘겨루기에 있다. 독일의 팽창과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 이 두가지가 양차세계대전의 근원이었으며, 유럽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이집트와 중동의 아프가니스탄이 충돌하게 된다.물론 이 책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 잠재된 불안과 공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할 수 있으며,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시간적, 공간적 흐름에 따라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물론 100년전 그 당시만 해도, 오스만 제국은 3000만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제국이다. 반면 영국은 300만이 채 안되는 인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이 사랑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이 자신의 오만함과 교만, 착각으로 스스로 권위가 추락하게 되었으며, 그 빈자리를 차기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차지게 된 그 전과정, 윈스턴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자시느이 회고록을 집핗하기 진전인 1922년까지 , 유럽과 중동, 미국을 아우르는 걷재한 공간에서 멀어지는 8년간의 시간적인 변화를 고찰해 나가고 있으며, 거대한 오스만 제국이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라크, 터키, 사우디아라비아로 분리된 이면에 숨어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현대 중동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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