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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멍때리기
웁쓰양 지음 / 살림 / 2021년 10월
평점 :
오히려 진솔한 이야기를 쓰면 되는 거였는데 그 부분은 생각도 않고 애초에 가당치도 않은 '좋은 글' 쓰기에 집착했던 것이다. 물론 진솔한 글쓰기 역시 만만한 문제는 아니지만 내게는 근사한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는 조금 쉬워 보였다. 그리고 가능한 그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며 글을 써나갔다. (-9-)
사춘기 내내 나의 꿈은 오직 고향 별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므로,재수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고 지구에서의 새 꿈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학교,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두 무의미한 짓을 하는 바보들 같았다. (-65-)
우리는 그렇게 1년을 더 연애하고 결혼을 했다. 아버지가 뇌종양 수술을 받던 날,"내가 자기를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며 나보다 더 엉엉 울었던 남편으로, 처제 병원비를 기꺼이 내주던 형부로, 딸만 있던 우리에게 아버지의 어려운 병수발까지 해주던 둘째 사위로 곁에 있었다. 우리는 듬뿍 사랑했고 바득바득 싸웠다. 그렇게 찬란한 30대를 오롯이 그와 함께 보냈다. 그의 젊은 미소, 그의 젊은 머리카락, 그의 젊은 팔뚝, 그의 젊은 허벅지, 그의 젊은 입술, 그의 젊은 에너지가 나를 통해 빛났고, 그리고 헤어졌다. 길고 긴 연애가 끝이 났다. 그의 말대로 결혼은 단체 생활이었고, 나는 내가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을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 (-121-)
'어떤 작가가 될 것이가?'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어떤 작가가 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흙을 잘 고르는 것만 생각하느라 정작 정원을 어떻게 꾸며나갈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새롭게 던져 놓으니, 그 자체가 해답이 되어주었다. 어떤 정원을 만들지 결정하니, 할 일들이 하나둘 정리가 됐다. (-177-)
'다 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 거네. 나 말고 다 바빠 보이니까 괜히 더 불안한 거였어. 그래서 쉬면서도 늘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거야.아주 잠시라도 모두가 다 멈춰 쉴수는 없을까? 내가 한번 그렇게 해봐야지.'
카페에서 멍 때리며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수첩에 이렇게 끼적였다.
'멍때리기 대회'(-192-)
이후'멍때리기 대회'정도의 홈런을 친 적이 없는 거로 봐서는 확실한 이유를 나 역시 모르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특정한 이유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우연이라는 것이 하나 둘 모여 만들어진 결과 아니었을까?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다는 조금 힘 빠지는 답 말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해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218-)
회화, 영상, 대규모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경험을 섭렵한 자가는 가수 크러쉬의 우승으로 화제가 된 <멍때리기 대회>를 만든 작가 겸 예술가였다. 이 책에는 작가 스스로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 멍때리기 대회를 만든 전과정 밑바탕 뒤에 작가의 어릴 적 삶과 인생 ,스토리까지 적요되고 있었다. 한 권의 책 속에서, 사춘기 어린 시절 느꼈던 세상에 대한 이해감, 나와 타자의 경계를 구분짓고, 바보스러운 이들의 자화상을 지켜 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결정하게 된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앞으로 무얼하면서 살것인가, 남들처럼 살 것인가,아니면 나답게 살것인가 결정하는 것만 남아 있었다.그것이 길면 길수록 공상이 되고, 망상이 되고, 상상이 된다. 상상이 어떤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 때,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은 창의성이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서 찬양하려고 하였다. 스티브 잡스이 머릿 속에서 애블의 의대한 작품이 만들어졌듯이, 작가에게 멍때리기 대회는 , 삶의 전환점이며, 작가로서 입문할 수 있었던 자신감이었다.우연이 필연이 되고, 그 필연적 요소가 히트작이 되었을 때,느꼈어야 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갑자기 우연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무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고 난 뒤 , 그 뒷 마무리를 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살아가면서, 작가의 삶 속세 깃들어 있는 인생의 변곡점을 보면, 내 삶이 보이고, 내 인생의 변곡점을 하나하나 반추해 나갈 수 있다. 즉 이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은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힘들게 바득바득 살지 말며, 인생의 틈을 만들어 낸다면, 그 틈 속에 내 삶을 새로운 삶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