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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객잔 - 김명리 산문집
김명리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7월
평점 :
맞다. 자기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버리는 노인은 없다. 놀라워라. 치매에 드신 우리 엄마, 즐겨 부르시던 노랫말만큼은 한 소절도 잊지 않으셨구나! (-61-)
기억의 거개가 유실됐어도 글자와 숫자만은 또렷하게 읽어내시는 엄마가 1번에 동그래미 꾹 눌렀다시며 마당의 불두화 꽃그늘 아래서 주간노인요양보호센터 차량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주권행사가 될지도 모르는 오늘 엄마의 투표 참여, 촛불혁명이 일구어 낸 이 땅의 민주주의가 내집 마당의 불두화 꽃송이 들처럼 환하게 만개하길 비는 2017년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선투표일 아침이다. (-67-)
내가 마스크 쓴 것을 유리문으로 확인한 아주머니가 문을 따준다."떡 없어요. 며칠 전부터 떡을 만들 수가 없어요. 이 동네 상권 다 죽었어요." 깊디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뒤돌아서는 내 드에 대고 "백설기 서너 개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 가실라우?' 하기에 한 개만 달라고 했더니 두 개를 싸주며 "한 개는 서비스유우" 한다. (-97-)
첫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 의 날개 사진을 나 모르는 누군가 찍었던 그해 봄, 해프닝으로 끝난 두 번의 자살 솓종이 있었다. 오래 모아둔 수면제를 단숨에 한 주먹 털어 넣었을 때는 때마침 집으로 찾아 온 친구에게 발견되었고,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음반을 반복적으로 리플레이하다가 급기야 커튼에 목을 매었을 때는 커튼대가 부러져 발목뼈에 금만 가는 정도로 또 한 차례의 헤프닝도 우스꽝스럽게 마무리되었었다. (-137-)
골짜기에 다시 눈 내리는데 사흘 전 빙판에 미끄러져 퉁퉁 부어오른 팔목이 책상 면에 닿을 때마다 전열선을 스친 듯 찌릿찌릿하다. 본시 우리 삶이 크고 작은 면목이 그러하듯 설화에 취했다가 설화를 입은 셈이 되었다고나 할까. (-164-)
굶주린 겨울 고라니들에게는 풋것을, 청설모와 다람쥐와 새들에게는 알곡을, 정처를 찾아 헤매는 길고양이들에게는 잠자리와 사료와 비린 것을 내어주어야 만 한다. (-200-)
산자락 아래서 성장기를 보낸 나 또한 신의 그 커다란 그늘에 안기어 보이지 않는 사이, 손톱 발톱 자라듯 마음의 눈금이며 조바심이며를 키워 나갔을 것이다. (-235-)
산문이란 영어로 prose였다. 흩어있는 일사을 모아놓은 글에는 일상과 소소한 인생이 담아있었다. 살아가고 살아지는 것, 나의 시간의 편린들이 산문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인간의 내밀한 삶의 고통들을 반추하게 된다. 수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고, 강에 흩뿌려질 때, 가장 인상깊었던 단 한순간이 산문에 채택될 때가 있다. 나의 철학, 나의 인생관, 나의 신념이 산문에 반영되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산문에는 가을이 느껴지는단품에 대한 잔향이 있었으며,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는 작가의 의식구조가 나오게 된다. 누군가의 삶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고, 치매에 걸린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이 곧바로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 순간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면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상기하고, 자신의 과거 속 자살시도와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며, 서로의 삶을 연결하게 되었다.
어쩌면 ,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들, 산문집 <단풍객잔>을 통해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꿈틀거리는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우리 사회가 만든 어떤 틀안에서 나를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고 있었다. 단풍객잔, 인간은 가을 단풍 앞에서, 겸손해지고, 오만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손님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죽음 이후, 삶의 이후,그 하나 하나가 서늘하게 느껴졌던 것, 그 서늘한 순간 희망을 찾게 되고, 위로와 위안을 얻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앞에서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산문집 <단풍객잔>을 통해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