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보기 - 에리히 캐스트너 시집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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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가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살인적인 인내심과 사력을 다해
그는 펜대에 매달려 높이 기어올랐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선조들이 원시림에서 기를 쓰고 기어올랐던 것처럼
그는 문화의 숲에 사는 원숭이다. (-26-)


벽에 기댄 맹인

희망도 없이, 슬픔도 없이
그는 머리를 숙이고
지친 몸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지친 몸으로 쪼그려 앚아 생각한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이전 그대로다.
보지 못하는 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보지 못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는 발자국 소리, 가는 발자국 소리.
어떤 사람들일까?
왜 아직도 멈춰 서지 않는 걸까?
나는 맹인익로 당신들도 맹인이다.
당신들의 가슴은
영혼에서 나오는 인사를 보내지 않는다.
내 생각에 ,내가 당신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가까이 오라! 눈이 멀었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때까지
몸을 숙여라
낯설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때까지
눈을 내리깔아라.

이제 가라! 당신들은 바쁘지 않는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라.
하지만 이 구절은 기억하라.
보지 못하는 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103-)


악의 기원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귀엽고 정직하며 선량하지만,
어른들은 참아 줄 수가 없다.
이 사실은 때때로 우리 모두의 기를 꺽는다.

지금 악하고 추한 노인도
나무랄 데 없는 어린아이였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친절하고 매력적인 아이도
훗날 덩치만 큰 비겁자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파리의 날개를 뜯어내며 노는 것이
아이들의 참된 모습인가?
어린 시절에 이미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악은 고칠 수 없고,
선은 어린 시절에 죽는다. 


동창회

그들은 예전처럼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볼링 클럽과 같은 분위기에서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한바탕 흥을 냈다!)
서로 월급을 비교했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학창 시절을 이야기했고
연극에 대해 미친듯이 떠들어댔다.
그들은 하나같이 배가 나왔다.
다들 부인도 있었고
아이가 다섯인 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술잔을 비웠고 농담을 하고
머리는 모자를 쓰는 용도로만 달고 있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떠들고
혼연일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은 허전해졌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급기야 그들은 부인의 몸매와 가슴과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해
시시콜콜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제 겨우 서른이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들은 완전히 숨이 멎지 않은 시체와도 같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거드름을 피웠다.

자리가 끝나갈 무렵,
한 친구가 갑자기 일어나
진절머리가 난다고 말했다
너희 모두 수염이 더 많이 나고
너희들은 닮은 수백 명의 자식을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제 자러 간다며 자리를 떠났다.

다른 친구들은 그가 왜 갑자기 가 버린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지웠다.
그들은 일요일 아침 사냥터로 
야유회를 떠날 계획을 세웠고,
이번에는 부인들을 대동하기로 했다. (-218-)


시집 <마주보기>는 에리히 캐스트너(1899~1974) 가 1936년에 발표한 시집이다. 1936년에는 베를링 올림픽이 열렸고,히틀러 통치 하에 놓여진 독일 제국주의다. 그 시대의 암울함을 피부로 느꼈던 그가 죽음의 사선에서 발표한 시가 <마주보기>였다. 이 시는 정서적인 위로, 정서적인 비상 상비약이라 부르고 있다. 사람들 스스로 죽거나 자살하는 것이 빈번하였던 그 시절, 그가 건네주는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는 죽기로 결심한 이들을 살리는 매개체가 되었다. 살아가고, 죽어가는 것, 시는 그 시대적 암울함을 마주보고,응시하는 것에서 답을 찾게 되다. 이 시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기술과 과학이 바뀌고,트렌드와 라이프 스타일도 바뀌었지만,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실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내가 죽어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눈이 멀었지만 그를 맹인이라 부르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세상을 보는 두눈을 가지고 있어도,맹인처럼 살아가는 그들조차 비장애인이면서 정신적이 맹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주보기가 되지 않는다는 말과 일치하고 있다.세상과 마주하기 싫고,나와 마주하기 싫어하고, 세상에 대한 혐오와 구토를 배설한다. 나의 삶과 너의 삶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삶, 그것이 반복되고 있었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항상 기회를 엿보는 이들의 군상들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동창회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서로 자랑학디 바쁘고,비교하기 바쁘며, 칭찬학리 바쁜 현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그 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가 살았던 시절의 동창회나,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동창회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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