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숫자를 누른다 예서의시 16
김태경 지음 / 예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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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를 지내다

두메산골에 터 잡아
어느새 200년이나 지났다.
우리의 뿌리였고
그 뿌리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에
푸른 잎들 주렁주렁하다
피붙이들은 다 해맑게 살다가
해마다 먼 길에서 달려와 숨을 고른다.
한 때는 어린 조카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다시 어린 고사리손을 잡고
이곳 쉬텃거리로 돌아와
두 다리 쭉 뻗고
오월의 푸르름을 먹으며 앉아 있다
봉분 위 제비꽃도
봄을 기다려 살아냤다는 듯이
산골 물소리에 젖어 싱싱하게 피어난다.
마가목, 주목나무 잎들은
오월을 깃발처럼 흔들고 있어라
팔순을 벌써 지난 나이에도 
절하는 손자들에게
살아갈 때 우애가 중요하다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흙ㅇ데서 뿌리가 뻗어가듯이 땀 흘린 만큼
어디서나 당당하게 어깨 펴라고
제비꽃도 우리도
가만히 듣고 가슴에 새긴다. (-15-)


영주호미

콩밭머리 돋아난 달개비들
어머니께서 손에 꼭 잡히는 호미로
그 뿌리조차 뽑아내면
콩은 환하게 열매를 맺었어라

하찮은 듯한 호미가
서양의 꽃밭을 들썩인다고 하니
대장장이 한평생 풀무질로 살아온 꿈이
물 건너가 살아나고 있어라

우리가 함부로 대접한 것들이 
귀한 손이었던 것을
다른 나라에서 더 알아준다니
철물점에서 다시금 너를 쓰다듬는다.

세상살이 보잘것없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절뚝이며 살아간다 해도
철물점에 걸린 기다림으로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오지 않겠는가

너를 벽에 딱 걸어놓으니
지난날 밭머리에 살다 가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이웃들도 다 보인다.
그 서러움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43-)


가는 길

강을 건너간다.
살다가 모두 저 강을 건너간다.
살얼음으로 살다가
흙 묻은 호미를 내려놓고
먼 산인줄 알았는데
도라지꽃 헤치고 오르다
눈물이 뚝뚝 꽃대궁을 적신다
발자국만 남은 언덕에서
새 한 마리
산을 쪼는 것을 본다
사람은 저마다 술 한잔으로
흙 묻은 삽을 매고서
산을 내려간다
도라지꽃은 환하게 피어 있는데
솟아안 동그란 무덤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새
날지 않는다.
날아도 날개가 없다고 (-70-)


발치

어금니가 끝자락에 터 잡아
오랫동안 맛을 씹어 나를 키웠구나
사랑을 만지듯이 너를 더 만져 
윤나게 아껴야 했거늘
너의 용서는 수십 년 켜켜이 쌓여 있거늘
썩어가는 슬픔으로 몇 밤이나 뒤척였을까나
못다 한 사랑 먼 발치에 있는데
이 가을 나뭇잎 떨어지듯
너를 발치하여 멀리 보내는 날
더 아끼고 사랑하지 못한 미안함이
핏물처럼 떨어지누나
이별의 슬픔으로 남아 있는 이들
혀끝으로 매만지는 빈자리
무심한 게으름을 깨물고
남은 날까지 어금니가 나를 키웠듯이
다짐의 치약을 짜
너의 이웃을 사랑하리라 (-114-)


우리는 각자의 삶이 있다.삶의 무게는 각자 다르지만 그 무게는 나를 성장하였고,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살아가면서 느꼈던 수많은 희노애락이 켜켜히 ,하얀 벽지에 묻어나 누런 띠로 서서히 바뀔 때가 있다.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삶이, 숫자와 데이터가 중심인 세상으로 바뀌면 우리의 인식과 자각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중시키고 있다.나의 것과 타인의 것에 대해서, 하나 하나 서서히 다름을 인정하게 되고, 그 안에서 나에게 익숙함과 낯설음을 서로 분리하기 시작하였다. 즉 나에게 익숙했던 삶이 어느 순간 낡음이 되고, 그 과정에서 세상은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자 할 때, 어느 순간 서운함을 느끼게 되었다.시를 가까이 하게 되고, 당연한 것에 대햐서 하나 둘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는 삶이었고, 삶은 시였음을, 그 하나하나 알아가고, 그 안에서 깊은 생각들을 찾아낸다는 것에 대해 ,기본을 찾고 , 누군가의 비밀을 하나 둘 주섬주섬 얻어가게 된다


시인이 느끼기에 비밀번호란 나와 타인의 신뢰이다. 공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비밀번호, 시간과 시간을 분리하는 비밀번호,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비밀번호는 나의 은밀함이며,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무형의 가치였다. 이 책에 나오고 있는 흙, 뿌리, 호미,그리고 헌책방과 숫돌은 바로 익숙함에서 낡음으로 바뀌게 되는 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관심들이 시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내 안의 발치된 어금니처럼, 어느 순간 버려졌다는 건 누군가의 잘잘못에서 비롯되었고,마치 나의 무의식적인 사유를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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