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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탁월한 취향 - 홍예진 산문
홍예진 지음 / 책과이음 / 2021년 7월
평점 :
"가져,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부끄러운 고백인데,이 대목에서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당히' 가 되지 않는 모성과 여성성에 대한 애증 때문에 ,동시에 사회의 테두리 밖에서 소진한 나의 시간이 쓰라리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은 없기 때문에. (-26-)
뱅상은 직업이 프로그래머이면서도 늘 자신을 포토그래퍼라고 소개하곤 했다. 그날도 사진 이야기가 나와서 그 참에 이유를 물어봤다. 뱅상의 말에 다르면 프로그래머는 돈을 벌기 위해 그냥 하는 일이고 자기는 스스로를 포토그래퍼라고 정의한다는 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나는,사진을 찍어봤댔자 사진집은 자기 돈으로 만들어 전시회도 동네 지인의 가게에서 소박하게 여는 뱅상의 직업을 취미라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그날 그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59-)
내 기억의 첫 번째 전축은 스피커없이 앰프와 턴테이블만으로 구성된 불완전한 세트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살림으로 엄마가 미혼일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라고 했다. 결혼을 하면서 좁은 신혼집에 스피커가 들여놓을 수 없어서 본체만 가지고 온 거라고. 첫 아이인 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튼 뒤, 그러니까 내가 주변의 사물을 의식하게 되고 난 직후인 것 같다. (-100-)
저들이 유발해내는 호감도 사실 여유에서 기인하는 거겠구나 싶은 자각이랄까. 허세가 필요 없는 것도, 실직을 하고도 차후 계획을 긍정적으로 세운 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다급하거나 궁지에 몰리지 않았기에 보일 수 있는 여유 아닐까. 내가 느낀 호감이라는 것도 그들의 경제적 풍요에서 오는 낙관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끌어낸 것일 테지 싶었다.(-130-)
그맘 때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던 친구가 말했다. 얼마 전부터 눈이 파란 도깨비 같은 아이가 가끔 우리 골목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컬러 TV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이전이었다. 파란 눈이라니, 친구가 말을 지어내고 있을 게 뻔했다. 만일 친구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도깨비이거나 괴물일 터였다. 내가 그렇게 황당무게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갈 바보는 아니지 않나.
"거짓말, 눈이 어떻게 파란색일 수가 있어?"
'파란 눈의 도깨비'가 내 눈앞에도 실제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185-)
신을 믿지 않는 나도 종교의 존재 가치에 관한 질문을 멀리두고 살수는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을 믿는 사람들과 그 세계를 세상의 한 축으로 인정하고 살 수밖에 없으니까. 이 질문의 답은 세상에 절대자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라고 여겨왔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다른 메아리가 울렸다. 결국 신이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을 대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241-)
인간은 각자의 삶이 있고,그 삶을 해석하는 타인이 있다. 그 타인에 의해서 평가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불일치는 항상 번뇌와 갈등의 씨앗이 되고, 때로는 크나큰 상처가 될 때도 있다.성인군자들이 죽을 때까지 배움을 놓치 말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와 나와 자아의 불일치에 대해서,끊임없이 탐구하고 성찰할 때, 그 후회는 적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관은 타인의 가치관과 번번히 충돌한다.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맞추 나가야 삶을 견딜수 있다.
또다른 방법은 산문을 읽는 것이다.나의 삶과 타인의 삶은 비슷한 곳과 다른 곳이 있다. 같은 면을 바라보면서,다르게 해석할 때, 그 가치는 남다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책 속 스토리에서 나에게 긍정적이거나 낙관적이거나, 색다름이나 낯설게 느껴질 수록 깊이 각인되고 있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나와 다른 그 무언가가 있다.그리고 그 장면 하나 하나 담아내고,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게 된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세월에 따라서 다른 느낌들을 캐치하게 되면, 그 너머의 과거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가 가게 된다. 저자가 보았던 파란 도깨비는 , 얼마되지 않은 과거의 우리의 인식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산문속에서나 그걸 기억할 수 밖에 없다.이 너머의 과거, 100여년전 조선인이 조선땅에 표류했던 외국인들,특히 서양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대, 저자가 느꼈던 파란도깨비와 흡사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하멜 표류기를 쓴 하멜, 드라마 제중원에 등장하는 알렌, 이들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시대에 그들을 바라보았던 시선과는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 있다.지금은 골동품에 가까운 유물, 전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저자가 유학길에서 보았던 그 누군가가, 한국에서 다시 보았을 때 ,그 느낌들은 묘하고, 오묘했을 것이다. 즉 내가 아는 사람이 미디어나 어떤 매체에서 등장할 때,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은 참 야릇한 경험이 될 수 있다.그 사람의 과거가 부정적일수록, 현재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될 수록 야릇하고,오묘하며, 당황스럽다. 그것이 이 책에 나오고 있다.그리고 그 하나 하나 캐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