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물에 들기 전 무릎을 꿇는다 - 김정숙 시집
김정숙 지음 / 책나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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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라는 염료

밤바다는 어눌한 정적이었다.
어둠 속 깊이 주저앉은 그늘이
얽히었던 사슬을 끄른다.
짠물 신물 배인 숨결의 틈 사이로
혼곤하게 스며든다.
징하게, 
자르고 으깨고 삶고 헹구고 꼽씹으며
조금씩 말문을 풀어낸다.
수천 겹 꺼풀을 입은
어두운 속내로 풀무질을 하는 어머니,
모든 순간은 오로지 물방울일 뿐이라며
한 번도 울지 않는다
슬픔이라는 염료만이 마음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
푸른 빛에서 더 푸른 빛깔의 우러나듯
자식 먼저 떠나보낸 속울음을 
우려낸다.

밤바다가 후련하게 검푸르다. (-47-)


여치

검은 엿처럼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늪에 빠진 여치

모시고 나와 방생하니

외할머니 모시옷 닮은 여치의 날개에서

비파 소리가 난다

풀밭이 술렁거린다. (-80-)


겨울잠을 자는 벌레

너를 벌레로 부르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네가 치자빛 아지랑이로 물드는 동안
나는 꼬물꼬물 기어가는 붉은 안개, 
몸을 가지고 싶어서 달뜬 세균
아지랑이가 축축해지면 안개가 되지,
한 숨결이
서로 다른 바람 속에서
꽃대와 꽃잎으로 흔들린다.
나직히 흔들린다.
안개가 가벼워지면 아지랑이가 되지,
실눈 뜬 너를 보고
네 눈웃음에 홀린 채
잠이 든 지갑을 잃어버린 나는
네 말을 만지고 싶다
아득한 꿈에 든 
자고 불쌍한 내 눈썹이
어둠 속에 떨고 있다
헌옷이라도 걸치고 싶어
한사코 몸을 가지고 싶어 달뜬 바이러스
지네보다 많은 꿈틀거림을 감춘 채
웅크리고 있다. (-111-)


길을 감치다2

거기를 지나왔으나
여전히 머무는 언저리처럼
소복소복 쌓이는 검정 위의 빨강들
검정이 길이라면 빨강이 나였을까
잿빛 하늘 아래
우두커니 소리나지 않는 말벌이다.
처음부터 고장 난 거라면
또 모르지만
공회전하는 경운기처럼 답답하다.
설익은 수박을 먹을까 난감해하던 아이가
'소고기'라고 깔깔대면서 먹을 때
모녀간 동업(同業) 으로 만든 붉은 피 흐르는 옷
곰탕집의 원조를 찾아 골목을 헤매듯이
잃어버린 첫사랑의 쪽지를 찾듯이
거기를 지나왔으나
여전히 머무는 언저리처럼
붉은색의 기시감만 자욱하다
소복소복 쌓이는 검정 위의 빨강들
검정이 길이라면
빨강은 나였을까
전새에 다 지었던 시의 환(幻)을 찾고 있다. (-149-)


시를 읽고, 삶을 읽고, 삶을 낭독하게 되었다. 시인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누군가 소중한 이의 삶이 있었고, 자연속에 나를 거울 속에 비추게 된다. 삶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 슬픔과 기쁨의 차이는 한 끗이다. 살아가되 견디는 것, 견디되 살아지는 것, 누군가 주어진 운명의 서사가 슬픔의 근원이 되고, 내 앞에 놓여진 슬픔이 원인이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세운다는 것은 평생 내가 짊어질 짊이자 책임이다. 그래서 삶의 무게는 저마다 달라지며, 내 삶에 그리움을 비추게 되었다. 죽ㄹ음이 그리움이며, 그리움이 죽음이다.


시집의 제목이 독특하였고,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시인은 무엇을 보았고,무엇을 생각하였고,무엇을 사유했을까 .시를 통해 그림을 그리고, 상황을 유추하게 되었고, 상상하게 된다. 시인은 겸손과 낮춤을 주문하고 있다. 햇살이 물에 들어가기 전 , 굴절되듯, 굴절을 무릎을 꿇는다 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 말은 우리 삶에서, 무언가 할 때, 어떤 것을 해야 할 때,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제목이다. 햇살이 물에 들어가기 전 무릎을 꿇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그것이 시인이 원하는 시적인 사유이며, 시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주섬주섬 옮겨담고 있었다. 명사를 동사화하고, 동사화된 표현을 명사로 함축한다. 자연의 억지스럽지 않은, 그것이 우리가 닮아야 하는, 닮아내야 하는 궁극적인 도달지점이며, 그 안에서, 내가 숨어 있음을 시인은 강조하고 있다. 자연 속의 말벌,그리고 붉은 그 무언가에 자신의 내면을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어떤 정해진 길 위에 놓여진 나라는 존재,그것이 빨강에 투영되고 있었다.슬픔의 근원 뒤에 기쁨이 있고,기쁨의 근원 뒤에 슬픔이 내재되어 있으며,그것이 결코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자연은 말해주고 있었고, 시인은 시를 통해 그것 표현하고 있다.그리고 그것은 시라는 염료에 채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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