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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대고 잇대어 일어서는 바람아 - 집콕족을 위한 대리만족 역사기행
박시윤 지음 / 디앤씨북스 / 2021년 5월
평점 :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닌 저 뭇후한 허공의 영혼을 보라. 함께 밤을 나눈 우리의 조우는 이쪽과 저쪽을 굳이 경계 짓지 않으면, 우리가 밤새 뒤채이며 나눈 영혼의 말들에는 오직 우리만 살아서, 세상 어떠한 형벌로도 처형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세상 어두운 말들을 몰라서 언제고 환하게 웃을 수 있고, 힘껏 안을 수 있다. 저쪽과 이쪽의 문자와 말이 서로 맞으니 우리는 '우리' 라는 울타리 속에서 서로를 맞으리. (-21-)
사람의 기척이 드물거나 끊긴 땅을 찾는 건 살기 위한 일말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이목을 끌든, 못 끌든 상관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처절한 위안이라도 되는 그런 곳을 찾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도 몸부림이 되는 그 기막힌 추위와 극심한 고독, 굳이 소리 내어 욾지 않아도 바들바들 떨며 전해져오는 온몸의 요동을 찾고 싶었다. (-51-)
시간이 지워버린 먼 옛날의 부활을 기대하지만 , 그러기 위해서는 땅이 뒤집히는 고통 또한 감내해야 한다. 먼지만한 흔적을 파고들어 멀고 먼 옛날의 뼈대를 찾고 살을 만들어 붙이고, 그럴싸한 이야기를 덧붙여 주면, 나같은 아둔한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인 양 믿어 의심치 않았다. (-110-)
고통과 절망이 짙게 깔린 어둡고 쓰라린 역사였다. 악한 것은 물러갔고 쇠한 것은 종적을 감추어, 다시 그 터에 순한 것이 돋아 숲이 되었다. 세월이 가니 스스로 물러나는 것과 , 침략해 빼앗은 것과, 맞서 지켜낸 것이 서로 다르니, 맞서 싸운 것은 스스로 정당하고 슬프고 깨끗한 것이 되었다. 거제사는 초목과 같이 무너지고 썩어 갔을지언전 '터'는 완전히 종적을 거두지 못하고 남아, 이름 없는 망자들의 안식처가 되어 넋을 달랜다. (-163-)
대단한 절터다. 이런 높은 골자기에 기와를 올리고, 불사를 벌이려면 엄청난 손길과 밑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험지에 이처럼 엄청난 일을 벌였을까. 몇 차례 발굴조사에도 아직 절 이름이나 창건 시기, 창건자가 누구인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아직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깜깜한 절터일 뿐이다. (-184-)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되겠다. 헤질 대로 헤진 멍석 틈 사이로 답이 드러난다. 수천, 수만 개의 기와와 자기 조각을 쌓아뒀지만 이마저도 와르르 무너졌다.누가 손을 댄 것일까. 아니면 세월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무너졌을까. 세월이란 싱싱하고 생생한 것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위력을 가졌나 보다. (-224-)
얼굴이 없으면 어떤가. 얼굴이 있어야만 표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따뜻하고 환하게 웃고 있어도, 속은 어둡고 냉골인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부처의 표정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웃으면 부처도 웃고, 내가 슬프면 부처도 슬프다. (-262-)
신발을 벗고 그때처럼 다시 첫발을 들인다. 발바닥에 닿는 풀의 감촉이 연하다. 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온몸으로 달려들어 나는 금방 젖고 만다.너도 나도 같은 자연의 한 점 존재가 되었으니 소곤거리는 풀들과 벌레들의 말이 멀지 않다.
무성한 풀밭에 안개비가 내리고 ,자욱한 안개 사이로 모든 것은 실루엣으로 존재한다. 절집은 오래전 쓰러져 없어지고, 인적이 사라진 곳에 사람의 흔적은 미미하게 남았다. (-314-)
겐테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조선에서 알게 된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암자를 손꼽자면 단연 유점사라고 했다. 조선의 불교 은자들은 청빈함을 철저히 지키고, 오늘날까지 손수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부를 맏으며,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금강산의 승려들은 이국인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352-)
독특하다는 건 이럴 때 쓰여지는 것 같았다. 보편적으로 내가 생각한 역사 여행은 대한민국 주요 명승지나 절터를 직접 보고, 느끼고, 감상평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가에게 , 인간에게 유명하다는 것은 큰 감흥이 없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역사 여행,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역사여행일 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고, 기행을 한다는 건 오로지 나를 향한 과정속에 나를 채워 나가는 것이다. 온전히 내 발과 나의 손과 나의 눈에 담아낸 기억에 의존한 철학적 사유는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곳이더라도,기억에 오래 담겨지게 된다. 주어진 삶과 주어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절터에 자신을 가져 가다는 건,나를 위한 선택이며, 나에게 나 자신을 채우기 위한 과정 속에 있었다. 이 책은 국도 7호선과 폐사지가 담겨져 있다.
폐사지에는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곳이다. 무언가 절터로서 현존하지만, 어떤 완벽한 조형물, 아름답거나 특별한 그런 가치가 현존하지 않는 그곳에 절터가 있다. 오로지 자연과 가까운 곳, 자연과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뭍어난 그곳에 벓레가 터줏대감이었으며, 새와 야생동물의 쉼터이기도 하다. 네비게이션이 닿지 않은 곳을 스스로 찾아내 저자가 찾아다닌 이유는 오로지 그곳에서 고독을 씹으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공간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코로나 18 이후 사람을 피하게 되면서 , 나타난 현상들은 자연이나 야생동물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역사 기행에서 쓸쓸한 곳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시간을 견뎌내고,세월을 견뎌냄으로서,흔적들의 폐잔병들을 주섬주섬 찾아내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생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절터, 폐사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서,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켜켜히 쌓인 세원의 때를 상상에 의해서 뜯어내고, 재현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