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바꿔봅시다! - 염동연이 말하는 노무현 신화의 탄생
염동연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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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계 일원인 나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자 '배신자' 라느 낙인이 찍혔다. 물론 동교동계 윗분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동료, 선후배들로부터 질시를 한 몸에 받았다. 동교동계가 온힘을 다해 밀었던 이인제 후보를 꺾고 스스로를 '변방의 장수' 라고 했던 노무현을 당 대선후보로 당선시켰으니 말이다. (-10-)


"저번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측에서 YS(김영삼) 인형을 태질하고 불로 태우던 사태를 염려하시는 모양인제...DJ는 나의 정치적 스승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되면 남북관계와 외교 문제는 늘 그분의 의견을 참고해서 국정을 펴나가겠습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노무현은 그렇게 답했다. 더 이상의 답변이 필요없었다.
"돈은 있습니까?"  (-27-)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9월 무렵이다. 노무현은 1990년 1월 '3당 합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통합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사건)'을 부도덕한 야합'이라고 비난하며 ys의 통일민주당을 박차고 나왔다. (-29-)


꼬마민주당은 1991년 9월 신민주연합당(평화민주당과 재야세력이 결합해 만든 정당) 과 함께 통합민주당(이하 민주당)을 창당했다. 노무현이 제1야당의 총재였던 DJ 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31-)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통합추진회의 (통추, 대표 김원기)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됐다. 1995년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를 거부하고 야권분열 반대 및 지역주의 극복 등을 주창해왔기 때문이다. (-41-)


어렵사리 차린 금강캠프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캠프 사무실은 제법 면적이 컸다. 커다란 공간에 나와 안희정, 이광재, 서갑원 그리고 여직원들까지 대여섯 밖에 없었다. (-65-)


광주 경선 노무현 1위는 천지개벽의 돌풍이었다. 그러나 '이인제 대세론'이 꺾이고 광주의 돌풍이 '노풍'으로 된 결정적 계기는 이인제 후보 측의 미숙한 대응 탓이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는'청와대의 노무현 지원설' 이른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음모론은 당원과 국민들로부터 '이인제는 입전에도 자신이 후보가 안 되면 또 뛰쳐나가겠다는 건가' 라는 의심으로 되돌아왔다. (-76-)


"나 보고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돈 내놔라!"라고 말할 참이었다. 어찌 조직을 돈 없이 가동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돈 걱정을 하지 말라던 사람이 내가 걱정을 안 하게 하고 있는다? 캠프는 열었고, 이미 발은 담갔는제....(-90-)


"난 해낼 수 있어요.DJ는 못해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매우 자신있는 어조였다. 느닷없이 DJ 를 거명하는 등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 노 고문이 미리 생각해둔 말이라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117-)


그러나 정몽준은 노무현의 단일화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정몽준은 "후보단일화를 하면 내가 '호남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기에 나는 (단일화를) 안한다"고 답했다고 유 전의원은 전했다. (-208-)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 11월 말 후보등록일 직전에 가까스로 후보단일화를 했다. 정몽준 후보가 사퇴하면서 25% 였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44% 로 껑충 뛰어 단숨에 이 후보를 제치고 1위로 부상했다. 
그런데 그토록 어렵사리 이룬 후보단일화의 틀이 12월 18일 한밤에 깨졌다. 선거일을 불과 1시간 30분 가량 앞두고 정 대표가 돌연 노후보 지지를 철회한 것이다. (-247-)


그를 원칙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편법이나 비정상적인 방법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칙주의를 사회제도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실주의가 된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 이라크 파병을 실행하고 한미 FTA를 착수한 것을 되짚어보면 잘 알수 있다. 노무현의 트레이드마크는 '원칙 수호','반칙이 없는 사회','정의' 등이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 DJ 는 미래형이고, 노무현은 현재형이다. 정치스타일과 노선 면에서 그렇다. (-298-)


노장관은 당시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언론도 더 이상 특권적 영역을 아닌 만큼 세무조사를 받을 때는 받아야 한다. 이제는 언론에 대해 전쟁도 불사할 수 있는 기개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언론사는 대통령의 권한에 버금갈 만큼 막강하다. 누구나 천적 관계가 있는데 언론만 천적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308-)


2002년 12월 19일 정치인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당시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대표적인 인물로 안희정,이광재 가 있었으며, 천호선,그리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염동연 특보가 있다. 여기서 낮은 지지울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인 노무현은 동교동계의 지지를 한몸으로 얻었던 죽지 않는 피닉새로 불렸던 이인제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소위 동교동계의 일원이었던 염동연 특보는 그로 인해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책에는 정치인 노무현과, 대통령이 된 노무현을 상호비교할 수 있으며, 동교동계 정치인의 실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건 내년 2002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동안 잠잠했던 동교동계가 정치에 개입하고 있는 전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며, 한화갑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에 대한 시선들이 상당히 따가운 민심이 ,지금 여기저기서 도드라지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꼬마민주당이었던 민주당의 가장 최저였던 그 시대를 고찰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경선 과정에서 불리한 조건을 딛고, 이인제를 밀어내고 노무현께서 민주당 후보로 될 수 있었는지 하나 하나 따져 물어 보게 되었으며, 정치란 상당히 오묘하며, 어렵다는 것을 캐치할 수 있게 된다.


정치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군가 그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염동연 특보는 처음 노무현 대통령 마들기에 전적으로 뛰어들게 되었고, 원칙주의자였던 정치인 노무현의 부족한 것을 채워 나가게 된다. 정몽준과 노무현의 통합과정에서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노무현 신화는 갑자기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궁하고,위기의 순간을 극복해낸 묘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여년 동안 조용히 자신시의 삶을 살았던 염동연 특보가 한권의 책을 썼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또한 동교동계를 둘러싼 여러 정치인들의 따가운 시선들이 왜 그런지 하나하나 물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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