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공주가 좋다 1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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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구멍을 잔뜩 뚫었던 거지?"
2000년부터 부여시와 논산시에 맞닿은 공주시 남단의 탄천면 유적을 발굴하던 조사단은 마주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한참 발굴 작업을 하던 도중에 마치 개미굴처럼 파인 구덩이들을 발견했다. 이 구덩이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좀처럼 감을 잡기 어려웠다. (-27-)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수촌리 유적 발굴을 "무령왕릉 발견 이후 최대의 성과"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덤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이전까지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백제 최고 지배층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먼저 이곳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단연 돋보이는 유물은 금동관이다. 다른 지역에서 발굴할 때는 한 개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금동관이 수촌리 유적 내 무덤에서 무려 두 개나 출토됐다. (-41-)


심지어 충청남도 담당 공무원은 "여기서도 중요한 유물이 수습되면 농공단지 조성은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 라며 2지역 발굴에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2지역에서 백제 고분군의 흔적이 우연히 발견됐다. 발굴단은 1`지역에서 2지역까지 계속 발굴 작업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고분들이 다수 나타났으며,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엄청난 유물이 계속 쏟아겨 나왔다. 결국 수촌리에 조성하려던 의당농공단지 계획은 취소됐고, 2008년 의당면 가산리로 부지를 옮겨 새롭게 조성됐다. (-57-)


공산성은 백제 중흥의 거점이었고, 왕도가 사비로 옮겨간 후에는 꺼져가는 백제의 불씨를 마지막까지 불태웠던 역사의 한장이었다.공산성이 백제의 역사를 통틀어 얼마나 중요한 장소였는지,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들이 조용히 일러주고 있다. (-107-)


평소에 송산 둔덕에서 놀던 아이들이 돌방의 돌이 갈라진 틈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봉분 안에 있던 물건, 즉 껴묻거리를 몇 개 집어다 고물상 등에 팔았다. 그러자 곧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공부군에서는 군수가 직접 고분을 조사해달라고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의뢰했다. 그러고 10월이 되어서야 발굴조사원이 현장에 도착해 산의 남쪽 능선에 펼쳐진 구릉지역에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5기의 고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29-)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하나하나 소중히 간직항 만한 문화재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국보 163호로 지정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시해놓은 지석을 꼽는다. 지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언제 태어나서 무슨 일을 했고로, 언제 사망했는지 기록해둔 석판을 말한다. 무령왕릉에서도 지석에 표기된 '사마왕'을 통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171-)


"그럼 유적지 부분을 통째로 다른 곳에 옮겨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공사 현장 담당자가 이 한마디를 던지는 순간, 회의장에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오랜 시간을 끌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회의 중 진퇴양난에 처한 공사 현장 담당자가 절망적인 심정으로 던진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문화재위원들은 시공사의 답답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현존하는 유적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긇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설명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1996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공주에서는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공주와 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한창이었다. 1995년 3월 하순에 착공한 뒤 공주 시내를 관통하는 구간까지 공사를 마친 상태였고, 금강을 건너는 백제 큰다리 교량을 건설하고 있었다. (-199-)


우리나라의 세계유산 중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자연유산에, '한국의 서원' '종묘' '석굴암과 불국사' 등은 문화유산에 해당된다. '백제역사 유적지구' 역시 문화유산이다. (-241-)


백제 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터, 능산리 고분군, 나성, 익산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터가 있다. 실제 백제는 삼국시대의 주축이었으며, 신라와 고구려 못지 않은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실제 일본에 백제 유민들이 들어가서, 일본의 헤이안 시대 문화를 만드는 교두보가 된다. 실제 일본 역사,일본 문화에서 백제유민을 언급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으며, 백제의 흔적과 문화적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한성을 수도로 했던 한성백제가 도읍을 지금의 공주, 즉 백제시대에 웅진으로 불리었던 곳, 웅진을 도읍으로 하는 웅진백제로 이어지게 된다. 백제의 역사를 본다면, 백제 말엽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부여의 사비 백제까지 찾아가 볼 수 있다.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 백제의 역사는 신라의 역사에 비해 많은 역사가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역사 퍼즐을 맞춰 나가야 하는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역사 뿐 아니라 문화,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문화재 발굴 기술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땅속에 묻힌 백제의 문화재가 인간이 사는 곳 ,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필연적인 문화재 자료조사 뿐 아니라 우연에 의해 발견된 문화재 발굴은 더 많았고, 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 역사의 핵심 키포인트다.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왕이었던 사마왕, 무령왕릉의 역사를 문화재를 통해 이해하고, 분석하면서, 상상과 추론하게 된다. 그건 백제의 역사가 고구려, 신라 외세의 침략에 의해 여러차례 망가졌음을 알 수 있다.신라에 대해 논한다면, 찬란했던 화랑정신을 언급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백제의 역사는 견휜과 의자왕을 먼저 떠올리고 있다. 신라를 찬란한 역사, 백제를 망국의 역사로 인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백제 문화권역에서 경제개발,도시개발을 할 때마다 발견되는 것이 백제의 문화재 지표 조사과정에서 발굴해낸 문화재, 문화 유적들이며, 그 문화재들은 백제문화의 중요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475년부터 660년까지 백제의 역사 이해 뿐만 아니라 도읍지로서, 백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공주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웅진도읍기 왕과 왕족의 무덤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 백제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백제의 불교 문학을 이해하는 정림사터, 굴식돌방무덤이 있는 능산리 고분군, 사비의 도서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중국의 조성제를 모방한 왕궁리 유적, 백제 무왕때 조성된 미륵사터는 백제를 이해하고 , 백제문화와 역사,생활상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문화제이며, 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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