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평점 :
11일 새벽 1시 30분, 봉기가 시작된 지 3시간 만에 우창 전체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반란군의 손실은 전사자 10여 명에 부상자 20명이 전부였다. 반면 청군의 사상자는 500명이 넘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우창봉기' 이다. 루이청이 버리고 간 총독부 건물 앞에는 혁명군을 상징하는 '철혈 18성기'가 내걸렸다. (-38-)
쑨원의 본격적으로 반청혁명에 나선 계기는 청일전쟁이었다. 일본군의 공격 앞에 무기력했던 청군의 모습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충격이자 굴욕이었다. 그는 톈진으로 가 조정의 실권자 리홍장에게 편지를 써서 구가 개혁과 부국강병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건의했다. 심지어 직접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의 지도자가 될 것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리홍장에게는 황당한 소리여쓸 것이다. 그 시절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지식인 축에 넣어주지 않았던 시대였다. (-155-)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 약법대로라면 국회에서 취임해야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법을 바꿔 청나라 황궁인 자금성의 태화전에서 성대한 취임식을 치렀다. 화려함은 황제의 즉위식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청조를 무너뜨린 우창봉기 2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시곗바늘은 새로운 시대를 향하기는커녕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249-)
그러나 1924년 10월 23일 '베이징정변'을 일으킨 펑위샹이 자금성을 비우고 퇴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푸이는 톄진의 저택에 조용히 은거하던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 (-367-)
티베트는 청조가 망하자 1913년 2월 13일 제 13대 달라이 라마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라싸의 포탈라궁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라싸에 있던 중국인 관료들과 중국군은 티베트 군대에 의해 모두 무장해제되어 중국으로 쫒겨났다.외몽골을 정벌한 돤치루이는 티베트까지 되찾으려 했다. 1918년 1월, 류쩐호우가 3만 명의 병력으로 티베트 동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험난한 지형과 국경을 돌파하고 창두를 비롯한 쓰촨성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446-)
천중민은 아무 실력도 없는 쑨원이 군벌의 힘을 빌려서 군별을 정벌하겠다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쑨원은 이미 몇 번이나 좌절을 겪었으면서도 실수를 반성하거나 바로잡으려는 노력 없이 번번이 요행을 바라고 모험에매달렸다. 불굴의 의지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웠다.게다가 쑨원의 동맹자인 돤치루이는 공화정을 짓밟고 총부리를 겨누었던 상대가 아닌가. (-519-)
그런 장쭤린의 마음속에도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관동군이었다. 그는 관동군의 힘을 빌리는 대가로 매국이나 다름없는 밀약을 맺었다. 동북과 내몽골 동부에서 일본의 침탈을 용인하여 사실상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내용이었다. 외부에 알려진다면 궈쑹링의 반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판이었다. 즉대를 물리치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장쭤린은 뒤늦게 왕융장의 충고를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669-)
펑위샹은 마음만 먹으면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괁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장제스는 자기 자리를 펑위샹에게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다.장제스보다 5살 연상인 그는 명성과 지위 , 경력 증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장제스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장제스가 자신보다 훨씬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중국의 지도자가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펑위샹은 쑨원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거부감이 있었고 중국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시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그의 희망은 중국을 통일하고 내전을 끝내 민중이 편안하게 사는 세상을 여는 일이었다. (-755-)
이 사건은 결코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은 이미 회복 불능이었으며 서로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소련의 간섭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상하이 정변을 용공과 반공, 혁명과 반혁명 세력의 충돌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기만이자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소련이 중국공산당을 앞세워 성급하게 국민당을 장악하려 하자 반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점에서 4.12 정변은 민족과 반민족의 싸움으로 봐야 한다. (-856-)
결혼식은 호화스러우면서 엄숙했다. 그저 두 남녀의 혼인이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권세 있는 집안과 앞으로 중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제스가 쑨원의 실질적인 계승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쑨원의 처제였으므로 그녀와의 결혼은 배경이 변변찮은 장제스에게 지도자에 걸맞은 권위를 부여했다. 정작 쑨원의 부인 쑹칭링은 참석하지 않았다.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던 그녀는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박살 낸 장제스를 평생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939-)
장쭤린 암살은 고모토 다이사쿠와 그에게 동조한 관동군의 몇몇 장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며, 총리인 다나카는 물론이고 본국 정부나 쇼와 천황, 심지어 군부와도 무관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과 고모토가 남긴 회고록에 근거한다. 그러나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도 어디까지나 "고모토에게 들은 얘기" 이며, 사건에 직접 관여했거나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았던 것은 아니다. (-1008-)
1936년 12월 12일, 새벽 5시, 중국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공산군 포위망의 일각을 맡은 동북군 수장 장쉐량과 제17로군 사령관이자 시안 수정공처 주임 양후청이 반란을 일으켜 시안 교외의 화칭츠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를 체포한 것이다. 장제스는 물론이고 참모들과 시안 시내에 배치된 중앙군 병영도 반란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시안사건은 격동의 20세기 중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면서 중국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사건으로 꼽힌다. 시안사건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껶는 일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21-)
장쉐량은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채 꾸준히 저울질했다. 어느 쪽에 붙어야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지반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뇌했다. 일본의 협박, 민족주의로 격앙된 반잃 여론, 장제스의 회유 사이에 끼인 처지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한 쉽지 않았다.장쉐량은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갈 의지는 없었다. (-1041-)
젊고 야심만만한 장쉐량은 관내로 세력을 확대하여 예전에 아버지 장쭤린이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노렸다. 그에게 중원의 싸움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는 반장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채 중앙에 복종을 선언하면서도 장제스가 병력 출동을 요청하자 동북의 안정을 명목으로 거절하고 약간의 군수물자를 제고하여 생색만 냈다. 그는 기회를 봐서 관내로 진군해 베이징과 톄진을 장악할 생각이었다.장제스와 펑위샹,리쭝런의 충돌이 본격화하던 19129년 5월 17일, 장쉐량은 동북의 주요 지휘관을 비밀리에 모아서 회의를 열었다. (-1178-)
중국군은 변변한 지도조차 없었고 산소가 희박한 4,000미터의 고산지대를 행군하느라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티베트군의 저하을 거의 받지 않은 채 1일 진격 속ㄷ도가 40킬로미터에 달했다. 오직 두 다리만으로 광대한 중국 전체를 2년 만에 정복한 이들답게 티베트의 험난한 지형과 기후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또한 철저한 사전 정찰로 티베트군의 병력 배치 상황과 훈련, 사기 수준, 무기 실태까지 모두 파악했다. (-1240-)
중국이 독가스를 보유하려면 일본처럼 자국 내에 독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화학공장이 있어야 했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펑톈군벌의 수장 장쭤린이었다. 군벌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현대적인 무기와 전술에고 탁월한 식견이 있었던 그는 독일인 화학자 여러 며을 초빙하고, 1925년 3월 22일 펑톈에 중국 최초의 화학병공창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염소가스와 머스터드가스 ,포스겐 등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독가스를 생산했다. 독가스는 허난성에서 벌어진 우페이푸와의 전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펑톈군은 독가스 폭탄을 항공기에 탑재한 뒤 우페이푸 진영에 떨어뜨렸다. (-1359-)
중국 역사에 정통한 권성욱 작가는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1895년 부터 1930년까지 중국의 깊은 역사를 분석하고 있다. 중국사에서 100년전 35년동안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내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국을 이해할 수 없고, 대만, 한국, 일본의 역사를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역사를 교과서로 배울 때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교양 및 역사로서 가치가 있으며, 1400페이지정도의 두께를 지니고 있지만, 중국의 근현대사 길잡이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19세기 중국은 중화민국이라 부를 정도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아편전쟁으로 자신의 민족적 자부심이 철저하게 망가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철저히 분석하고자 하였고, 청나라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북양군벌을 통해 중국 스스로 강해지길 바랬지만, 일본은 중국보다 한걸음 더 나갔으며, 힘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즉 이 책에서 눈여겨 볼 인물들로 청나라 말기의 실질적인 권력자 위안스카이(1859~1916.6.6),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1866년~1925.3.12), 중국 본토에서 쑨원과 경쟁구도를 지니고로 있었던 미지의 인물 장쒀린 (1875년~1928.6.4), 그리고 중화민국 제1대 총통 장제스(1887년~1975.4.5),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1893~ 1976.9.), 그리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1898~2001) ,마지막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1906.2.7 ~ 1967.10.17) 황제가 있다.이 들 일곱 중에서 , 장쒀린과 장쉐량의 인물에 대한 정보와 역사적 사실들이 부족했던 이유는 두 부자가 중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중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지만, 중국 공산당이나, 중화민국, 일본의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한 인물, 역사적으로 지우고 싶은 인무로 해석된다. 그건 대한민국이 일제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에 중국의 동북 만주 지역을 통치했던 이가 장쒀린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힘의 균형추 역할을 했지만, 일본과의 매국노로 치부될 수 있는 밀약으로 자신의 운명을 비참한 채 막을 내리게 된다. 일본 관동군의 독단적인 철도 테러로 인해, 우한정부의 장제스, 난징정부의 마오쩌둥, 그리고 북양정부의 장쒀린 간의 힘겨루기가 꺽이게 되는 원인이었다. 즉 일본이 중국을 삼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던 인물이 장쭤린의 죽음과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들인 장쉐량의 장제스 체포에 있다. 어부지리로 일본의 관동군이 일본의 만주 땅을 차지하였고, 중국 본토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유였다.더 나아가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개제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땅을 확보할 수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의 힘의 균형추 역할, 쑨원과 장제스가 꿈꾸었던 중국이 완성되었다면, 공산당은 중국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북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세에 간웅과 영웅이 탄생한다고 하였던가, 간웅이었던 위안스카이와, 영웅이었던 마오쩌둥의 인물 됨됨이 그들이 걸어온 길을 본석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뿐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부딪친 6.25 사변까지 연결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