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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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는 그의 병들었던 몸처럼 초라했다. 변두리 병원의 영안실이 협소하고 낡은 탓만이 아니었다. 다른 두 곳의 영안실에 비해 문상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문상객 없는 빈소의 휑뎅그렁한 을씨년스러움이라니, 잡초 헝클어진 주인 없는 무덤의 적막감과 괴기스러움 그대로였다. 그건 버려지고 외로웠던 박동건의 생전의 삶 그대로였다.(-30-)


세상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도 , 아무리 높은 명성을 드날리던 사람도 숨 끊어져 죽어버리면 그 존재를 냉혹하리만큼 지워버리는 파도 거센 바다였다. 생전에 큰 위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어도 세상은 아무런 이상도 탈도 없이 태연하고 무표정하게 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전향한 장기수 하나쯤이야, 그 허무감 앞에서도 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하는 회한이었다. (-61-)


반인민적이고 비인간적인 차르 왕조를 타도하고 깃발을 세운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일당독재라는 비민주적 모순을 저지르며 차르 왕조보다도 더 심하게 인간의 자유를 억압했고, 개성과 재느을 말살했고, 사생활을 파괴하는 횡포를 일삼다가 끝내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99-)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이 가장 편안한 죽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혀는 질긴 힘줄도 없고 부드러워 아주 쉽게 잘린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길게 빼물었다. 그 순간 앞에 누가 쏙 나타났다.
"안 돼요, 안 돼요. 이렇게 죽으려고 그 고생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지 마세요. 저와 꼭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당신은 이겨낼 수 있어요. 제발 힘내세요." (-153-)


박동건의 죽음은 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변전과 맞물린 이념적 인간의 종말을 상징한다. 그러나 윤혁은 사상적 동지의 죽음으로 인한 회한과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 나와 그 자신의 삶을 새롭게 꾸려가야 하는 자리에 놓여 있다. (-204-)


대한민국 사회는 참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제 시대에서 권력을 지닌 기회주의자들, 독재에 기생했던 이들을 비판하고, 잘잘못을 따졌던 운동권 세대, 386 세대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바꾸고자 하였고, 기존의 사회적 악습을 고쳐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 현재 비추어 보자면, 과거 독재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386세대가 중심이었던 지금의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는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체념하게 되고, 내 삶을 온전히 보존하는 길로 선택하게 된다.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지 않고 저항하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다.소설 <인간 연습>에 등장하는 주인공 윤혁과 그이 동지이자 이념적 쌍생아였던 박동건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으이 이념을 선택하는 동지이다. 스스로 저항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스토리에서 박동건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가난하고, 비전향 장기수로서 살아왔던 지난날, 가족도 떠나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그 삶이 죽는 그 시점까지 행복하지 않았다.그의 삶의 곁에는 온전히 초로의 노인 윤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쓸쓸하게 죽었다. 살아간다는 것,이데올로기의 전환점에서 한 사람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은 상당히 나약하고,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이데올로기가 나와 거리를 둘 때와 나의 삶과 엮일 때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질되는지 ,조정래 작가의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유를 얻고 싶어서 투쟁을 하였고, 세상을 바꿨는데,도리어 자유가 억압되는 모순이 존재한다.그럴 때 스스로 냉소적으로 바뀌게 되고, 세상의 도덕적 근본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었다. 즉 조정래 작가의 <인간 연습>은 역사속의 텍스트, 근대사를 실제 삶과 대조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오로지 사회주의를 느껴 보지 못했던 세대,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마주해야 하는 6.25의 실체와 근원적인 모순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미미한 인간의 존재감이 어디까지인지 살펴볼 수 있다.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가지 갈래길에서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자신의 자유이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다. 소위 스스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면,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싶어도 쉽게 할 수 없다는 걸,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자본주의 체제가 보여주는 이론적인 개념과 현실에 투영되는 그 모습과의 괴리감이 어디까지인지 차근 차근, 하나 하나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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