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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국의 골프 여제들
오상민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2월
평점 :
인근 숙소로 자리를 옮긴 구옥희는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포도가 먹고 싶으니 돌아오는 길에 사오너라" 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지인들과 마지막 대화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오후 4시 37분께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2013년 7월 10일 57세 나이였다. (-13-)
13번 홀에서 룰을 위반해 2벌타를 받은 것이 결정타였다. 이영미의 규칙 위반읊 지적한 사람은 챔피언 조에서 함께 경기하던 오카모토 아야코였다. 대회장 지바현 교 컨트리클럽은 1990년 개장한 신생 골프장이었다. 잔디 컨디션은 말할 것도 없고 배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이영미는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 로컬룰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규정도 모호했다. 다 잡았던 우승을 억울하게 헌납한 기분이 들었다. (-61-)
신소라는 투혼의 아이콘이다. 많은 남성 팬이 따랐고, 후원사가 줄을 섰지만 부상과 지병 속에서 굴곡진 투어 생활을 했다. 작은 몸과 약한 체력도 문제였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만의 조감도 드로우샷을 개발했다. 집에서도 퍼터를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쇼트게임과 퍼트 연습에 공을 들였다. 온갖 악재를 이겨낸 유일한 방법이었다. (-105-)
2010년 JLPGA 투어는 총 54개 대회가 여렸다. 그중 절반인 17개 대회는 외국 선수가 우승컵을 가졌다. 17승 중 15승은 한국이 차지했고, 미국과 대만이 1승씩을 챙겼다. 한 시즌 15승은 당시 한국 선수 최다승이었다. 2008년과 2009년에 기록한 10승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안선주가 4승, 전미정이 3승, 미국과 일본 투어를 병행하던 빅인비와 신지애가 2승, 신현주, 이지희, 임은아, 김나리는 1승을 보탰다. 개막전과 시즌 최종전을 한국 선수가 가져왔고, 상금왕과 평균 타수 1위도 안선주가 차지했다. 그야말로 한국인 잔치였다. 일본은 홈그라운드에서 승률 50% 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221-)
골프 하면, 우리는 박세리를 알고 있고, 김미현과 박인비, 신지애를 알고 있다.이들은 한국 스포츠 중 골프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박세리 키즈 ,김미현 키즈가 지금 현재 골프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IMF를 극복하게 해주었던 박세리 선수 , 김미현 선수가 골프 1세대가 아니었다. 박세리,김미현 이전에 JLPGA에서 활약하였던 구옥희와 이영미, 한희원이 일본골퍼 계를 휩쓸게 된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LPGA 우승 타이틀은 박세리가 아닌 구옥희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한국 골퍼의 역사를 본다면 박세리 키즈 이전에 구옥희 사단, 이영미 사단이 먼저 존재했다.
이 책에서 소개한 골프 여제들의 면면을 본다면,이들이 없었다면, 박세리도, 박인비도 쉽게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커다란 황야 벌판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격어온 이들이기에 ,누군가 닦아 놓은 그 길을 순탄하게 박세리, 박인비가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행산업으로 인식해왔던 과거 대한민국 사회의 편견에서 ,구옥희,이영미, 원재숙 선수는 일본 투어를 다녔고,우승을 일구어 냈다.즉 그들은 수많은 시련과 아픔을 겪었고, 스스로 골프 후학을 길러내게 되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언어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극한 시련들이 있었으며, 골프의 룰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골프 우승 트로피를 반납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었다.골프 역사에서 잘 일어나지 않은 한국 골프 여제들의 흑역사를 꼽씹어 보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2010년 일본 JLPGA를 한국 낭자들이 휩쓸었던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에 의해서, 나타난 우연이 아닌 실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은 대를 이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평생 골프를 하면서 살아온 대한민국 골프의 어머니 구옥희 선수 이후 1994년생 배선우 선수까지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