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반야심경 2
혜범 지음 / 문학세계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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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나가서 산 게 10년인가, 올해로 속가 나이 서른 넷?"
"예, 스님."
해인은 속으로 성호 스님 편을 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8-)


"우거지상 하지 마. 이놈아. 인생이 왜 고해인가 하면 우리가 산다는 게 괴로움의 바다요, 불붙은 집 속에 노는 너랑 다름없기 때문이야." (-64-)


그 선배는 해인에게 집착을 버리라고, 애욕을 끊으라고 말하던 것을 다 잊은 모양이다. 신도들에게는 여전히 집착을 없애야 고통이 사라지고, 무소유다. 나를 버리라 하면서 자신들은 종권 다툼에 날 가는지 모르고 삼보 정재를 유용하기 일쑤며 펄펄 날뛰는 모습들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114-)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넣지 마라.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 버리는 불꽃과 같은 것, 얽어 묶는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고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아니나 다를까,지혜가 해인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눈치였다. (-154-)


모든 것은 다 괴로움이라는 진리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라는 진리도 없으며, 괴로움을 없애고 성취해야 할 것은 열반이라는 진리도 없고, 열반을 이루기 위한 수도의 진리도 없다. 우주의 큰 지혜도 없고 큰 지혜에 의해 증득된 얻음도 없다. (-238-)


색이 공이 아니고 공은 색이 아니라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이 관계성, 4공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사상이 공 사상이고, 공문이라고까지 한다는데, 공을 알게 되면 삼장 법사의 제자인 원숭이 손오공의 이름이 왜 손오공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공이란 공성과 연기하는 존재,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 조건에 의지하는 것은 모두 실체가 없다,본질이 없다는 뜻이다. (-249-)


불교의 깨우침을 느끼게 되는 소설 반야심경이다. 삶에서 고뇌가 번갈아 생기고, 그 안에서 나에 대해서 상처와 아픔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갉아 먹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게 되었다. 헛것과 부질없음에 대해, 타인에 대해서 헛점과 복수로 나타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스스로 그 안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 하나 깨닫게 되었다. 지나고 보면, 내 앞에 놓여진 생로병사, 성수괴공, 생수이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이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늘이면 꽃이 지는 자연의 이치에서 인간의 삶도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오로지 안간만이 그 삶에서 벗어날 거라는 착각이 나의 번뇌의 시작이며, 인생의 절망에 빠져 들어서, 본능과 욕망에 집착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해인 스님으로 시작하고 있었다.일찌기 출가하여, 스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운명,그 운명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고난과 고뇌에서 비롯된 일이었고,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 의지해 살아가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인정할 수 없었던 그 운명적인 서사,하지만 불교의 깨우침을 받아들이면서, 윤회사상에 근거하면서, 서른 이후 해인스님은 서서히 자신의 삶을 받아들에게 되었다. 똑바로 살아가되, 주변을 두루 포용하고 살아가는 것, 불교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계율을 반드시 지키는 것, 내 앞에 고통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허무라는 개념, 비어있는 삶도 마찬가지였다. 뇌전증, 소위 지랄병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병을 앓고 있었던 해인 스님 앞에 놓여진 인생의 희노애락을 본다면, 이별의 끝은 이별이며, 이별의 시작 또한 이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 단어가 품고 있는 반야심경 속의 불성을 깊이 깨우치는 것은 자신의 삶과 운명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 그 자체에 숨겨져 있었다. 내 앞에 놓여진 삶이 자신의 삶을 크게 흔들어 놓더라도 그 삶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해인스님은 불교에 귀의하면서 ,만나게 된 지혜를 통해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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