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내 등을 떠미네 - 아픈 청춘과 여전히 청춘인 중년에게
한기봉 지음 / 디오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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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서 연필들을 꺼내 본다. 긴 놈, 짧은 놈, 둥그런 놈, 각진 놈, 이 색, 저 색, 각양각색의 연필들이 제 몸이 닳리고 깎여왔다. 뭉툭한 놈을 골라 깎아준다. 마치 생명의 숨결을 2불어넣어주는 기분으로 ,그런데 연필의 소명은 소멸이다. 연필은 다른 필기구와 달리 몸토을 통째로 소진된다. 인생이 세월의 파도에 부딪쳐 조금씩 뭉툭해지고 짧아지며 소멸돼 가듯. (-21-)


나는 시골 사는 노모와 통화할 때마다 "밥은 먹었냐?" 소리 들으면 눈물 난다. 밥 못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엄마에게 자식이란 영원히 얌전하게 입 버리는 제비새끼인 거다. 평생 해 준 집밥을 이제는 떨어져 살고 힘에 부쳐 못해 주는 안타까움을 그 말로 달래는 거다. 내 엄마는 매년 택배비 들여가며 쌀이나 보리쌀이나 찹쌀을 부친다. (-94-)


미국 신문의 부고란(obituary)를 본 적이 있는데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게제는 유료이고, 우리처럼 일정한 양식이 아니라 글이라는 점이 다르다. 거기엔 고인이 주인공인가. 고인의 삶을 추억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쓰는 사모곡 사부곡 망부가요, 그들이 지어 주는 에피타프(묘비명) 다. 유족이나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이 글로 써서 보통 사진(고인의 젊은 시절 사진이 많다) 과 함께 제게한다. 유족의 이름은 나와도 직업은 표기하지는 않는다.(-167-)


"저는 담낭암에 걸려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항암 치료는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40여 년간 여러분께 공적으로 사적으로 신세를 져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직 기력이 있는 동안 저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장례식을 미리 열고자 하니 참석해 주시면 저의 가장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조의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복장은 평상복으로 와 주십시오." (-45-)


이쯤되면 늙은 남편은 개보다도 못한 신세요. 일찍 죽어 주는 게 도리인 것이다. 이런 블랙 유모을 관통하는 철학은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인명재처人命在妻 같은, 아내를 우러르는 정신이다. 남자는 무조건 여자 말 잘 들어야 오래 산다는 것이다. (-241-)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지금 할 수 있는 건 희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직하게 절망을 견디는 일 뿐이다. (-268-)


수개월 전 어머니를 여윈 친구한테서 또 부고가 왔다. 부친상이었다. 몇 달 간격으로 부모를 다 보냈으니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부친에게 지병은 없었고 단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운이 쇠잔해지고 우울증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문상 온 친구들은 "그래, 그러셨을거야" 라며 위로했다. (-298-)


부모와 자식간은 천륜으로 이어진 혈연이라 하였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 된 아이를 여전히 물가에 내 놓은 아이로 바라보는 것은 이런 이융리다.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거느린 가장이라 하더라도, 그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만, 현실 속에 꿈틀거리는 상대적인 가치가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었던 추억, 기억들, 세월과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작가 한기봉은 작가이면서, 언론인이다.자신의 과거의 삶을 반추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것들을 연필과 필기구로서 옮겨 적고 있었다. 연필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그 순간들 그 과정들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 안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으며, 인생의 마지막 세월의 가을에 들어선 작가의 삶의 궤적을 엿볼 수 있었다. 매달 부고를 받는 것이 익숙한 나이, 누군가의 장례식에 가야 하는 나이가 찾아오면, 그것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미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 가치들은 무용하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고 아프고, 서늘하다. 바람이 내 등을 떠민다는 것은 나의 삶이 삶에서 죽음으로 떠밀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남은 생을 어떻게 지헤롭게 살아가야 할 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나이였다.우리가 만들어 놓은 관습의 잘못을 바꿔 나가는 것, 생후 장례식이 아닌 생전 장례식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지인 소식이 자꾸만 내 기억 속에 맴돌고 있어서 그런지,이 책에서 장례식,부고, 부고장, 죽음의 흔적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은 생을 잘 살아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한기봉님의 에세이 속에 묻어나 있었다. 타인을 위한 에세이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에세이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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