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끄는 건 나야
조야 피르자드 지음, 김현수 옮김 / 로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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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네는 까치발을 하고 ,함께 온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에밀리는 버스에서 만났어요."
아르시네는 에밀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g-4 호로 이사왔데요." (-8-)


내 동생이 에밀 시모니안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으니, 내 동생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건 완전히 다 된 일이었다
엘리스는 사과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그 사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보석은 내가 다 물려받겠지." 그러고는 깔깔 웃었다. (-152-)


4월 24일 집단 학살에 대하여 - 로버트 마다시안
기념비 건설 경과 보고 - 교회와 학교 협의회
민족으 비극, 목격자의 회고 - 카툰 예레미안 

강당 조명이 어두워지고 가르니크가 마이크 앞에 섰다. (-204-)


아르메니아에는 그런 관습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슬람 사람들에겐 가족 구성원 간의 결혼이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로 여겨지거든요. 어르신들이 특히 그렇게 얘기하죠.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부모님들의 사촌지간의 혼사는 천상에서 맺어준 연이다.' (-319-)


"이모가 먼저 결혼하는 거야,아님 비올레트 이모가 먼저 결혼하는 거야?" 아르미네가 물었다. 아르미네,아르시네, 소피는 셋이 나란히 서서 앨리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엘리스와 엄마는 나만 쳐다봤다. (-471-)


소설가 조야 피르자드는 1952년생, 이란에 사는 아르메니아 출신 소설가이다. 여기서 작가의 프로필에 있는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3국,조지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아르메이아 ,코카서스 3국으로 통칭하고 있으며,아르메니아의 역사만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지역으로서, 기독교의 역사 속에 포함되고 있는 아르메이나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로 부르고 있었다. 물롱 소설 <불을 끄는 건 아니야>에 나오는 4월 24일 '붉은 일요일'로 명명되어 있는 그 날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겐 ,3.1절과 같은 중요한 날로서, 아르멘니아인 학살의 날로 기억되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세 남매 이르멘과 아르미네,아르시네 쌍둥이 자매의 어머니 클래리스이다.그녀는 아르메이아에 거쳐하고 있으며, 주부이면서,장녀로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었다.한편 다섯 가족이 살아가는 그들 앞에 새로눈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이웃에 시모니안 부인과 그녀의 아들 에밀과 딸 에밀리가 이사오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클래리스의 여동생은 시모니안의 아들 에밀과 함께 하는 사이가 될 정도로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아르메니아인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클래리스의 삶은 우리에게 익숙하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장녀들이 결혼 후 집안의 살림을 일구면서, 묵묵히 아이들을 키우고, 성장시키면서, 참아가는 그러한 삶의 패턴들이 클래리스의 삶 속에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클래리스의 평온한 삶이 시모니안 할머니가 등장하고 부터였다. 보통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웃,이웃사촌이라는 개념이 아르메니아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시모니안 할머니가 클래리스의 가정에 사사건건 개입하려고 하는 그러한 모습만 보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아르메니아는 종교는 기독교지만, 삶은 아시아 적인 정서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한국과 다른 점은 한국은 근친관계를 허용하지 않지만,아르메니아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건 하늘이 맺어준 선물이자 인연이라 생각하며, 사촌 간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그들의 정서에는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여기서 우리의 시누이에 대한 개념이 소설 속에 있었다. 클래리스의 여동생 엘리스의 모슺,그녀의 모습을 보면 ,묘하게 얄미우면서도 친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클래리스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자신의 집처럼 생각하는 그녀의 횡보,그리고 시모니안 할머니와 연결되는 과정들 ,이러한 모습들을 하나 둘 살펴보고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이 소설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으며,잔잔하면서,은은함이 느껴지는 평이한 소설 <불을 끄는 건 나야.를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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