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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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군사적 위협을 의미했다.성경이나 무역품에 앞서 함선과 대포가 먼저 나타났기 때문이다.무인 집단인 사무라이는 본능적으로 전쟁의 위기를 직감했고,승산을 냉혹하게 계산했다.무인의 입장에서 전쟁의 승산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40-)


다음 날 형자으로 가면서는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해 죽는다.죽어서도 주군과 부모를 배신하지 않는다.천지의 일은 유유하며 신명이 모든 걸 비추고 계신다."라는 시를 읊었다.(-93-)


라슼트사무라이.사이고는 사후 우상화되었다.천황을 옹립하고 있는 메이지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으니 역적임에 틀림없는데 아무도 맘속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메이지 천황도 오쿠보 도시미치도 마찬가지였다.(-177-)


메이지유신 당시에는 '일신'괴 '유신'이라는 말이 경쟁하다 유신으로 정착되었다.700년간 계속된 사무라이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서양화를 추구했으니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데,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혁명' 혹은 '메이지 혁명'이라 하지 않고 유신이라고만 한다. 왜 그럴까?(-248-)


대한민국에는 10월 유신이 있다.일본은 10월 유신 이전에 메이지 유신 혹은 명치 유신이 있었다. 여기서 유신은 중국 고전에서 따온 말이며, 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큰 물결을 나타내고 있었다.유신은 혁명과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메이지 유신은 프랑스대혁명,러시아 혁명과 결을 다르게 하고 있다.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신분제 혁파가 일어났으며, 시대적인 변화,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번과 막부 위주의 사무라이의 정신을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따라 자신을 바꿔 나갔다.그 때가 1877년에서 1878년 그 사이였디. 즉 일본을 알려면,메이지 유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최후의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 시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의 삶을 이해할 때, 일본의 역사,문화,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막부와 번,사무라이는 사라졌지만, 일본은 여전히 사무라이 정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천황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들은 시대적 격변기를 마주하면서, 요시다 쇼인은 29살에 처형 당했으며, 시카모토 료마는 31살에 암살당했다.사이코 다카모리는 49살의 나이로 전삳괴었으며,오쿠보 도시미치는 48살에 암살되고 말았다.즉 그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면서도,그로 인해 그 격변의 변화를 몸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며,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정신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었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는 하나의 길잡이다. 격변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고 있으며,일본인들의 위기 의식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형성했음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었다.그들은 서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세계속의 일본이 되고 싶었다.봉건제 밑에서 안정을 꾀했던 그들의 위기의식이 그들 스스로 변화하였고, 경제대국 일본을 만들었다고 보면 ,어느정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반면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그들은 중국을 믿고,서양을 배척하게 된다.일본이 섬나라라는 특수한 환경이 그들을 스스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생존술을 터득해 나갔지만,반도국가 조선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믿어 의심하지 않은 중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에 갇혀 있었던 조선과 탈 새대주의를 외쳤던 일본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으며, 마지막 사무라이의 발자취를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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