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 - 황윤 역사 여행 에세이, 개정증보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1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8-1.jpg

 


1980년대까지 일반적 인식은 올림픽 공원 내 몽촌토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뱃ㄱ제의 한성 시대 수도인 위례성이 몽촌토성이라는 ,사학계 교수들의 주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에 몽촌토성은 80년대 올림픽동원으로 주변이 지정되면서 난개발을 막고 보존시킬 수 있었는데, 그런 방어막이 약했던 풍납토성에는 아파트와 빌라가 잔뜫 들어오게 된다. (-18-)


다른 금동신발도 빼어나지만 유독 고창 봉덕리 신발을 언급하는 이유는 1924년,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에서도 육각형 문양 안에 신묘한 동물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65-)


백제는 뜻밖의 신라의 배신에 대한 분노로 동맹국인 가야와 일본 병력까지 동원하여 신라를 매섭게 공격하였다.소백산맥에서 한강 유역으로 나올 수 있는 신라의 길을 점령하여 한강 진출을 다시는 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장을 책임지는 태자를 지원하기 위해 성왕이 태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이동하다가 그만 매복된 신라군에게 공격당하면서 사로잡혀 목이 베이고 만다. 성왕은 이렇게 위대한 백제의 꿈을 마저 완성시키지 못하고 서가하고 말았다.(-141-)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의 즉위 초반 큰 성공으로 신라를 크게 압박하는 등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하지만 의자왕은 성공에 취해 어느 순간부터 향락에 빠져들었으니, 궁을 화려하게 꾸미며 새로운 건물을 짓기도 했다. 이렇듯 귀족적 문화가 풍미햇던 어느 시기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벼락, 화재 등과 같은 사고로 무너진 목탑을 대신하여 신기술을 자락하듯 세워졌고 산뜻하고 깔끔한 귀족적 자태를 뽐냈다. (-173-)


백제는 신라와 달랐다.경주를 도읍으로 하였던 신라, 백제는 찬란한 뭄화를 자랑하지만, 도읍지는 한성, 부여,공주,익산,이렇게 나뉘어져 있었다.문화와 왕의 업적,더 나아가 그들이 해왔던 역사적인 대업은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화랑정신에 무너지게 된다. 돌이켜 보면 신라의 경주가 1000년 도읍지라는 상징적인 의미르 지니고 있는 이유는 백제의 몰락 덕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일본과 종국의 역사서 덕분에 알게 되었으며, 신라의 철저한 백제 유산 파괴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혼결은 살아남았다.


이 책을 보는 느낌이  경주와는 사뭇 달랐다.백제의 도읍지 하면 익산과 공부 ,주여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실제 백제는 한성에 도읍을 두었고, 그때가 최대의 전성기이자 몰락의 이유가 된다.즉 한강이라는 강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성은 매력적인 곳이지만,신라와 고구려의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로인하여 백제의 장점이 나라의 국운을 지키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말았다.


백제 반가사유상, 금동대향로,원각사지 10층석탑,정림사지 5층석탑, 이들은 백제의 중요한 문화재이며, 경주의 석가탑에 비유할 정도로, 문화재적인 가치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그리고 역사학자의 의해서 지켜지고 보존되었던 몽촌 토성과 발리 풍납토성은 박정희 정권이후 개발논리에 따라서, 문화재적인 가치가 많이 훼손되었다.한편으로 백제하면,무령왕이 떠오른다. 일제시대 이후 많은 도굴꾼에 의해서 약탈되었던 백제의 문화재, 그 와중에 우연하게 발견된 무령왕릉은, 백제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신라에 버금갈 정도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 또한 찬란하엿음을 알게 되었다.철기문화를 꽃피웠고, 석탑을 먼저 만들었던 백제의 과학기술, 더나아가,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재,앞으로 20년뒤 풍납토성 주변 부지를 문화재청 소속으로 반납하게 되면, 백제역사적인 재평가는 다시 바뀌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